스타트업의 정신 중 하나는 사회/산업 생태계 혁신에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스타트업이 진정 생태계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요즘입니다. 최근 불거졌던 모임 문화 플랫폼의 성추행 관련 이슈, 유사 챗봇 서비스 런칭 등 스타트업계에 여러 구설수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아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데요. 웹툰 서비스를 제공하는 ‘L 플랫폼’에서 작품을 연재하던/연재하기로 한 웹소설 작가진들이 갈 곳을 잃은 것입니다.
‘창작의 고통’이란 어구가 있죠. 너무 많이 쓰여 그냥 하나의 명사처럼 사용되는 어구입니다. ‘예술가는 원래 배고픈거야’라는 말도 아직까지 종종 들리곤 합니다. 2011년 최고은 시나리오 작가가 생활고에 의해 사망한 사건 이후 예술인 복지법, 일명 ‘최고은 법’이 탄생했지만, 6년이 지난 지금도 작가들의 삶이 더 나아졌는지 다시 의문이 갑니다.
2012년 설립된 L 플랫폼은 웹툰 플랫폼에서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부분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2015년부터는 웹소설 서비스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길 ‘누적 적자로 인해 더 이상 웹소설 서비스를 지속할 수 없다’고 하며, 결국 오는 9월 30일 서비스 종료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실상 적자가 생기면 해당 사업을 종료하는 것이 비즈니스에 있어서 당연한 수순입니다. 하지만 현재 L 플랫폼에서 웹소설을 연재하던 작가들은 성명서를 내고,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몇몇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사보지 말라고 SNS를 통해 독자들에게 알리기까지 했습니다. 왜 작가들이 몇 달간 공을 들이고, 애정으로 제작한 자신의 콘텐츠를 구매하지 말라고 스스로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 L 플랫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슈를 알아보았습니다.
1. 서비스 종료 공지 시점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한 작가가 8월이었던 연재일정을 9월로 변경하고자 웹소설 담당 PD에게 전화를 했는데요. PD는 연재일정을 절대 변경해 줄 수 없다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PD측에서 ‘사실 웹소설 서비스가 8월말 종료되니 9월이면 연재가 불가능하다.’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이 때가 8월 19일이었으니 서비스가 종료되기 단 10일 정도 남아있던 상황이었죠.
그리고 8월 24일 정식적으로 사측에서 공지가 내려졌고, 이 때 내려진 공지에서는 서비스 종료 일자가 9월 말로 변경되었습니다. (작가진 인터뷰에 의하면 소비자 환불 규정에 의해 종료일자를 늦춘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L 플랫폼은 웹소설 서비스 종료를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서비스를 꾸려온 작가진들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8월 24일 정식 공지가 나오기 전에 해당 사실을 알고 있던 작가는 20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서비스 종료로 피해를 입을 것으로 간주되는 작가는 약 100명~150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 작가가 여러 필명으로 다작하는 경우도 있어, 정확한 집계는 추산이 어렵습니다.)
게다가 24일 공지를 내리기 전날까지도 신작 소설을 투입하고, 코인 이벤트를 통해 웹소설 구매를 독려했다고 하는데요. 독자들은 미완으로 남을 소설을 구매한 셈입니다. 이에 작가진들은 독자들까지 기만하는 행위라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2. 서비스 종료 공지 방법
작가들에게 서비스 종료 안내가 나갔던 시점에서 웹소설 페이지를 확인해보아도, 서비스 종료에 대한 공지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웹소설 서비스 종료 안내를 웹소설 서비스 페이지가 아닌, 웹툰 페이지에만 띄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웹툰 페이지에 실린 공지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았습니다. 이에 작가진들은 이슈를 알리는데 제일 효과적인 팝업으로 공지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L 플랫폼에서는
‘종료 안내를 팝업으로 띄어줄 순 없으며, 논의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며 입장을 밝혔다고 합니다. 작가진들은 독자들도 해당 이슈를 충분히 인지해야 피해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일주일 동안 지속적으로 L 플랫폼에 서비스 종료 공지를 명확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8월 내내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작가진들이 한국소비자보호원과 공정거래 위원회에 요청한 결과 9월 1일 오후 팝업 공지는 아니지만, 배너 공지라도 내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래 사진 속의 주황색 배너)
3. 소통의 부재, 일방적인 공지
L 플랫폼의 웹소설 작가진들은 누적 적자에 관한 상세 사항이나, 보상방법 협상에 대해 대화를 하기 위해 L 플랫폼측에 여러번 전화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통화 혼선에 대한 우려로 작가들끼리 차례를 지키며 전화를 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제대로 된 답신을 받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그리고 작가진들이 제일 분개하고 있는 것은 보도자료는 꾸준히 내고 있으면서도, 작가진들의 연락만은 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작가진 중에는 L 플랫폼과 계약한 뒤 취업준비를 그만두고 웹소설 준비만에 몰두했던 청년도 있고, 아이의 엄마도 있습니다. 이들은 하루 사이 갑자기 일터를 잃은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L 플랫폼에 소설을 안정적으로 연재하기 위해 몇 달동안 미리 분량을 비축해두었지만, 결국 내보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안정적인 연재를 위해 평균 30편 가량 미리 준비해 둠).
작가진들은 막대한 누적 적자가 있었다면, 어떻게 다섯 달 전에 2천750만원 가량의 수상금을 건 웹소설 공모전을 실행할 수 있고, 어떻게 6월 달에 당선작을 선정할 수 있었는지…너무 졸속으로 처리된 것은 아닌지 분개하고 있습니다.
작가진 중 3명은 선인세(계약금)조차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L 플랫폼과 계약을 맺은 후 몇 달에 걸쳐 미리 소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70편을 준비해 둔 작가도 있었죠. 하지만 서비스 종료 공지가 나간 8월 24일 전에 넘긴 원고가 없다는 이유로 선인세를 받지 못합니다. 이들은 L 플랫폼과의 계약만 믿고 소설만 준비하며 무직 상태로 있었고, 서비스가 갑작스레 종료되며 또 다시 불안정한 생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추가: 선인세만큼은 지급하겠다고 주말부터 협상이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미완으로 남은 소설은 다른 플랫폼에 연재할 수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한번 유통되었던 콘텐츠는 가치가 상당히 줄어들게 되어 작가는 불리한 조건으로 계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존 독자 유실 및 판매량 급감도 각오 해야합니다. 게다가 플랫폼마다 선호하는 작품의 성격이 다릅니다. 작가들은 L 플랫폼의 색에 맞게 소설을 작성했기에 다른 플랫폼과 계약할 수 있는지도 미지수입니다.
작가진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L 플랫폼과 계약할 때, 저작권에 대해 확실히 단속해준다하여 계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제 소설이 불펌된 걸 보고 L 플랫폼에 조치를 요청했지만, 제대로 된 답신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직까지 제 소설이 불법으로 유통되고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 많은 웹소설 작가진을 담당하는 PD가 3명밖에 없었어요. 작가들의 메일은 방치되기 일쑤였습니다.”
“애초부터 웹소설은 L 플랫폼측에서 제대로 마케팅/홍보해주지 않았으면서 적자라니요. L 플랫폼에서 웹툰을 10번 홍보하면 웹소설은 4번정도 해주었습니다. 심지어 웹소설을 홍보할 때도 웹툰 홍보 글 밑에 ‘스크롤 내리 신 김에 웹소설도 보세요..’라는 문구를 사용해 많은 작가들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L 플랫폼은 작가들에게 보상이 충분한 것처럼 말하지만 저희의 입장은 달라요. 서비스 종료 전 석달 수익을 합산한 뒤, 한달 평균을 내 그 2배를 보상해 준다고 합니다. 8월에 계약해지가 됬으면 5, 6, 7월 수익을 합산해 나누는 거죠. 하지만 7월과 8월에 신작이 투입된 작가도 많기에 작가진들을 고려한 보상안이 아니에요. 작가들은 하루 평균 계산을 원합니다.”
“작가진들에게 미리 공지를 하고 슬슬 신작 투입을 하지 않겠다. 서비스가 종료되니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미리 언지를 주었으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거에요…마음의 준비를 하고, 글을 투고할 새로운 곳을 찾아보며 생계를 재준비했겠죠. 하지만 그렇게 덜렁 끝내버리면 당장 작가들은 어떻게 다음달을 살아내야하나요? 웹소설은 일주일에 두번씩 연재했고, 교정도 해야하는 빡빡한 일정 때문에 대부분 L 플랫폼에 올인했던 작가들이 많습니다. 다른 수입원이 없는거죠.”
현재 L 플랫폼의 웹소설 작가진들은 외롭게 싸우고 있습니다. 웹툰에는 웹툰산업협회와 작가협회가 있지만, 아직 웹소설 관련해서는 협회도 존재하지 않기에 기댈 곳도 없습니다. 웹소설 작가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이런 선례를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L 플랫폼처럼 큰 곳에서 일어난 이슈조차 조용하게 넘어간다면, 이런 부정당한 행위가 어디서든 반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9월 8일 금요일 L 플랫폼 웹소설 작가진들은 변호사를 선임하여 협의안을 L 플랫폼에 보냈고, 답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스타트업의 위기 대처능력이나 사과문은 구설수에 오르내렸죠. 개인적으로 ‘스타트업은 초기 기업이고 주니어가 많으니 이해해주세요. 이번 기회를 발판으로 더 잘 성장해나가겠습니다.’라는 핸디캡은 깔지 않고 경기를 했으면 합니다. 멋지게 혁신이란 이름으로 시작했으면 끝도 멋졌으면 좋겠습니다.
스타트업 성추행 사건에 침묵하는 구성원들을 향해 많은 분들이 분개한 일도 있었는데요. 실리콘 밸리에서는 우버의 예전 CEO가 인종차별적, 성 차별적 발언을 하자 #DeleteUber라는 운동이 일어났고 200,000만개가 넘는 계정이 삭제되었습니다. L 플랫폼 서비스 불매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DeleteUber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20만명이 잘못된 사건에 대해 입을 모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스타트업이 정말 혁신을 말하고자 한다면 투자/수상 소식보다는 이렇게 생태계를 점검해보는 이슈에도 조명을 비추어야하지 않을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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