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CO. 조명광 대표가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번 더 소개합니다.
‘고객은 왕이다’라고 외치는 기업과 마케터가 있다.
진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박수를 보내야 하겠지만, 구호와 생색만 있다면 소비자는 금세 그 허구의 실상을 파악하게 된다. 초공급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기업과 마케터는 권력을 소비자에게 넘겨준 것처럼 말하지만, 여전히 소비자를 기만하고 수익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일부 무리가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소비자에게 모든 권력이 돌아가고 있다. 원래 가졌던 힘을 되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 흐름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역사 속에 있었다는 흔적만 남게 될 가능성이 높다. 소비자의 가치는 항상 동일했다. 소비자 시대는 그 가치를 해석하는 방법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자연현상이다. – 21일 마케팅 중에서
고객, 손님, 소비자는 모두 같은 이를 부르는 것으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명칭이다. ‘손님’이라는 자체도 이미 높여 부르는 말인데 ‘고객’이라는 한자어가 더 높여 부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요즘은 어딜 가나 ‘고객님’이라고 한다.
고객 顧客.
돌아볼 ‘고’ 자에 손 ‘객’ 자를 쓴다. 고객은 단골손님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여기서는 그냥 소비자로 통일하자.
소비자는 생산자의 반대편에 서있는 단어로, 생산된 상품을 소비하는 사람을 말한다. 생산자보다는 상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기술적인 면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다. 물론 요즘은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소비자가 등장하여 이를 칭하는 프로슈머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컨듀서라고 하여 소비자를 앞으로 놓은 단어도 동일한 의미로 쓰이지만 프로슈머가 더 친근하다. 이제는 생산자가 시장을 주름잡는 시대가 아님을 보여주는 단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비자는 왕이기도 했다가 봉이 되기도 한다. 소비자는 무슨 잘못을 했길래 왕이 되고 봉이 될까?
소비자는 왕이다.
초공급과잉 사회에서 소비자는 왕일 수 있다. 넘치는 재화들 속에서 이를 골라 소비하는 사람이 이론적으로 왕이다. 생산자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각해보면 소비자가 진짜 왕이라는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재화를 소유하고 그 재화를 사용하여 소비하는 과정에서 재화의 가치가 중요시되는 것이다. ‘돈이 말을 한다(Money talks)’는 것이 그냥 나오는 말이 아니다. 소비자 자체가 왕이라는 위치를 가진 것이 아니라 결국은 돈이 그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재화의 가치만 중요시하다 보면 재화를 가진 소비자의 마음을 잃기 쉽다. 초반에 왕으로 섬기다가 점점 왕이 기업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선택을 계속하게 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런 슬로건이 있다. ‘1조, 고객은 항상 옳다. 2조, 고객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1조를 다시 보라.’ 미국 월마트의 슬로건이다. 샘 월튼은 K마트를 벤치마킹하여 발전시켰는데, 정작 2002년 K마트는 소비자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읽는 데 실패하여 파산했고 월마트는 상시 최저가라는 핵심역량을 유지하며 여전히 1등의 위치를 지속해나가고 있다.
소비자는 봉이다.
최근 독일의 한 자동차 메이커가 디젤 차량 배기가스 양을 조작해 전 세계적 이슈가 되었다. 현재 나라에 따라 소비자의 위치가 다른 경향을 보이는데, 미국에서 소비자는 왕이고 한국에서는 봉이다. 똑같은 소비자인데 미국에서는 천만 원씩 배상받았지만, 한국에서는 감감무소식이다. 이유는 한 가지다. 한국에서는 소비자가 봉으로 전락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이란 제도가 있어서 기업들이 소비자를 함부로 기만할 수 없다. 가끔 뉴스에서 어마어마한 피해보상 뉴스들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없다. 기업들이 그런 제도하에서는 기업을 해먹을 수 없다고 엄살을 떨어 놓은 탓에 이러한 법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스운 것은 국내기업들의 태도다. 미국에서는 소비자에게 벌벌 떨면서 한국만 오면 허리가 펴지는 것이다.
한국보다 미국이 훨씬 싸다. 하지만 한국에선 마치 고급차인 것처럼 광고하고 그에 맞는 가격정책도 가져간다. 한국에서의 판매 대상은 중산층 이상이지만, 사실 고급차를 타는 상류층은 아니다. 여기에 해당 회사의 한국지사의 태도에도 원인이 있다. 제도도 미비하지만 소비자의 위치에 따른 차별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상류층이 타는 차였다면 다른 태도를 보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 기업이 가진 고객 가치관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국산차라고 해서 다를까?
소비자의 진짜 가치는 무엇인가?
마케팅 프로세스에서 소비자는 최상위에 있다. 왕이라는 말은 좀 과장이고 자본주의의 시작과 함께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있게 되었다. 마케팅의 고전인 필립 코틀러와 게리 암스트롱의 《마케팅 입문》 1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마케팅 : 고객가치의 창출과 획득.’ 그만큼 마케팅에서 소비자는 최종 목표이기 때문에 매 단계 소비자의 의식과 행동을 고민하고 연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기업들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소비자를 무시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할 수 있을까?
기업에게 소비자는 개념적으로는 왕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수익의 대상일 뿐이다. 모든 기업의 목표는 이익 창출이다. 기본적으로는 소비자 중심의 상품을 기획하고 판매하지만 그 과정이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과정으로 옮겨가면 소비자는 뒷전이 된다.
은행이 진짜 소비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왜 이익은 은행과 자본가들이 가져갈까? 자동차회사가 정말 소비자를 위해 차를 만드는가? 한 10년씩 타도 고장나지 않는 안전한 차를 못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핸드폰은 왜 2년도 채 못쓰고 바꿔야 할까? 왜 해지지도 않은 옷들이 의류 수거함으로 가는 것일까?
기업은 수익을 위해서 고객이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니즈(needs)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필요성을 만든다. 욕망을 자극한다. 소비사회의 단면이다. 소비사회, 소비자가 왜 최우선인지 말해주는 단어이다.
사실 소비자가 따로 뭘 한 것은 없다. 시대가 흐르면서 소비자가 중심이 되는 산업구조가 만들어졌다. 소비자가 만든 것은 아니다. 초공급과잉을 소비자가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초공급과잉 시대에서 생존하려면 기업들은 소비자를 왕으로 만들어야 했고 모든 프로세스의 우선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수익이라는 목표가 정해지면 소비자는 수익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론적으로 소비자의 가치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과연 어느 CEO가 자신에게 부여된 목표를 달성하기보다 고객의 가치를 위해 그들의 수익을 포기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실에 나가보면 ‘고객이 왕이다’부터 시작해서 ‘고객의 가치를 이해하고 고객의 눈높이를 맞추고 고객이 원하는 것을 이룰 때까지 노력하라’는 등의 수많은 말들이 기업이 소비자의 입장에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를 한 꺼풀만 벗겨보면 소비자를 수익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인 수익성 중심 전략과 전술이 난무한다. 필립 코틀러에게 마케팅 입문을 배운 마케터들은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조직원으로서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점점 초심을 잃어간다. 소비자의 원래 가치에 집중하는 기업은 지속성을 가질 수 있지만, 재화의 가치에 집중하는 기업은 오래 가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기업이 고객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누가 소비자를 진상으로 만들었는가?
진상이란 말의 어원은 원래 윗사람에게 지방 특산물을 보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그 폐단이 많아지면서 겉보기에 허름하고 질이 나쁜 물건을 속되게 이르는 말까지 의미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물건을 보내는 일에 쓰였던 이 단어가 현대에 와서는 고객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어쩌다 소비자는 진상이 되었을까? 요즘은 어느 기업이나 ‘고객의 소리’라는 것이 있다. 물론 무시하는 기업도 있지만, 특히 유통업이나 소비재를 판매하는 곳에서는 중요시한다. 이 고객의 소리라는 것의 본질은 고객의 의견을 반영한 고객중심의 경영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고객의 소리를 가지고 직원 개개인과 팀을 평가하다 보니 되도록 글이 올라오지 않도록 하고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무마시키는 데 급급해한다.
이러다 보니 한번 맛을 들인 소비자들은 자신이 만든 문제라 하더라도 고객의 소리부터 찾고 보게 되었다. 소비자 상담실에서는 고성이 범람하게 되었고 책임자를 불러내라는 등의 뻔뻔한 요구가 끊이지 않게 된 것이다. 소비자를 진상화시킨 것은 결국 기업이다.
어떨 때는 간이라도 빼줄 거처럼 하다가 어떤 때는 개무시하기도 하고 소비자의 포지션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고 기업이 잘못한 것을 소비자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이렇게 원칙 없이 상황에 따라 대응하는 수위나 태도가 바뀌면서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 제도가 직원들의 족쇄가 된다. 이렇게 처음의 취지는 온데간데 없어진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은 기업이 초래한 셈이다. 물론 태생이 진상인 소비자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행위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기업이다. 기업이 항상 원칙에 따라 소비자를 대했다면 달라졌을 문제가 결국은 진상이라는 단어로 귀결된 것이다.
소비자는 언제나 제자리에 있다. 소비자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기업의 존재 이유이자 영원한 파트너이다. 마케팅 프로세스의 정점에 있고 기업에 존재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소비자의 진화는 기업의 진화에서 시작되었다. 기업의 마케터들과 의사결정권자들이 소비자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소비자의 자리는 바뀌어 왔다. 기업이 소비자의 가치를 단순히 이익에 둔다면 그 기업의 본모습을 소비자도 알게 된다. 이런 모습을 왜곡하는 기업은 오래 살아남기 힘들다. 소비자는 잘못이 없다. 왕을 만든 것도 봉을 만든 것도 진상으로 변이시킨 것도 기업이다. 마케터라면 다시 한번 소비자의 가치를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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