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휘 Bark 공동창업자가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번 더 소개합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나름 카메라 시장에서 제일 잘나가는 외국계 회사에 다녔다. 국내 대기업보다도 더 대기업 문화를 가진 외국계 회사에서 기획자로 일했다. 나름 신사업 담당이랍시고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면서 몇십억드는 프로젝트도 터뜨려 보고 사장님 앞에서 당돌하게 ‘이래서 뭐 5년 후에 회사 남아 있겠습니까?’하며 직썰도 날리는 자신감 넘치고 좀 건방진 사원대리 나부랭이였다.

그런데, 신사업을 담당하다 보니 자연스레 스타트업 동네에 놀러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그들이 무대에서 멋있게 피칭하고 투자도 받고 인터뷰도 하면서 뭔가 본인이 하고 싶은대로 다 해먹을 수 있는 스타트업계가 점점 부러워 지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뭐 하나 해보려고 하면 ‘차장님 -> 부장님 -> 임원진들 -> 사장님 -> 다시 임원진들 -> 다시 부장님 -> 다시 임원진들 -> 다시 사장님 …’ 이런 무한 트리를 반복하다 보면 내가 처음에 하려던건 수박이였는데 어느새 호박으로 바뀌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보니, 당연히 저 스타트업 형들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겠는가.

기획서 무한 루프에 한번 빠지면 빠져나올수가 없는 대기업 보고 시스템
기획서 무한 루프에 한번 빠지면 빠져나올수가 없는 대기업 보고 시스템

그래서 과감하게 때려쳤다.

원래부터 한번 꽂히면 나중에 ‘아 이게 아니였는데…’ 하고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쿨해보이는 선택에 자아도취하던 성격이라, 나름 계획도 세우고, 그만두기 전에 팀도 꾸리고, 아이템도 (내 생각에는) 뭔가 있어보이는 걸로 골라서 있어보이는 기획서도 만들고, 뭔가 이게 열라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엄청 스마트하게 풀어내려는 아이템처럼 스토리도 잡고… 아무튼 회사 그만두기 1개월 전까지는 자신감도 충만했고 바로 막 무대에서 피칭도 하고 그럴 줄 알았다.

그러다가 1개월 직전 갑자기 같이 하기로 한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고 팀이 와해되버렸다. 회사에는 이미 ‘난 몇 월, 몇 일부로 그만두겠소!’ 하고 통보해놓은 마당에 이미 업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길은 없어 보였고, 또 그러기도 싫었다. 그때 내 생각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같은 자아도취 마인드) 바로 이랬다.

나 정도면 신사업도 이것저것 해봤고, 포샵으로 디자인도 할 수 있다!

(파워포인트 디자인 하던걸 감히 디자인이라 불렀다…)

IT쪽에도 나름 아는게 많다!

(테크니들 기사를 열심히 읽던 걸 감히 이렇게 생각했었더라…)

피칭도 잘 할 수 있다!

(사장님, 임원들 앞에서 재롱떨던 피티실력을 감히 이렇게 평가했었더라…)

아무튼 나정도면 금방 개발자도 만나고 디자이너도 만나서 멋찐 팀을 꾸릴 수 있을꺼야!

이렇게 생각했던게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엄청난 무지로 나대는 초딩들의 외침과 마찬가지란 걸 느끼게 되는 건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둔 시점부터 열심히 이곳 저곳 스타트업 모임에 찾아다니고, 스타트업 이미 하고 있는 형들도 좀 찾아 다니고, 개발자 모임에 가서 열심히 아이템 설명도 하고 돌아다니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내가 가진 능력은 저기 길거리에서 나부끼고 있는 전단지 한장 딱 그 정도의 역할밖에 이 바닥에서 할 수 있는게 없다는걸 받아들일때 까지 딱 두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당시 스타트업 형님들이 나를 보면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꺼다. 이거 뭐 써먹을데가 있어야지..

cap2

그렇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내 4-5년의 커리어라는 건, 그냥 딱 3가지로 요약 가능한데 1) 보고, 2) 보고를 위한 기획서 작성, 3) 정치 및 의전. 그냥 이거 3개만 4-5년 동안 줄창 해오던 것이라는 걸 인정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거다. 그나마 더 오래 걸리지 않은게 다행인건, 나는 대기업에서 좀더 전문가 보직에 있는 사람들 (재무, 회계, 영업, IT 등등)도 아니었기 때문일거다.

그래서 모든 걸 다 인정하고, 내 무지를 깨달은 그 시점부터 최근에 정식으로 서비스를 런칭할 때까지 거의 1년 반의 시간동안 대학교에 다시 들어가는 심정으로 닥치는 대로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이도 요즘은 유다시티, 유데미 등 맘만 먹으면 프로그래밍이나 디자인을 초보 수준으로 익힐 수 있는 길이 널려있기도 해서 유데미에서 프로그래밍, UX기초, 스케치로 모바일 디자인하기 등등 앱이나 웹서비스 제품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기본기들을 착실히 공부해 나갔다.

다행스러운건 내 무지를 깨달을 즈음인 2015년 여름, 아무 생각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가본 해카톤에서 만나게 된, 그리고 지금은 고맙게도 이런 무지한 나와 같이 팀을 꾸리고 풀타임 스타트업을 같이 해주고 있는 만랩 풀스택 개발자를 만나게 된건 정말 행운 오브더 행운이었다. 현재 우리는 2016년 4월을 기점으로 우리 개발자님이 좋아하는 버번으로 이름을 지은 BourbonShake라는 스타트업을 꾸리고, 위치기반 소셜미디어 바크 (Bark)라는 앱을 서비스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나름 제품 디자인과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

앞으로 나처럼 뭣도 모르고 이 바닥(스타트업)에 뛰어들었다가 고군분투 하고 있는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 및 노하우를 서로 나누고 싶다. 열혈강호의 주인공 처럼 (물론 그는 슈퍼 천재긴 하지만) 어쩌면 차라리 백지에서 시작하는게 더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 처럼, 혹시나 나 같이 지금 회사에서 무한 보고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스타트업 쪽의 커리어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괜히 주눅들지 말고 과감하게 실행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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