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저녁 6시부터 7시까지 KBS 2TV에서 방영하는 만화들을 정말 많이 봤다. 골목에서 놀다가도 6시가 되면 집에 가서 만화를 봤으니. 7시에 만화가 끝나면 저녁을 먹는 건 국룰이었다. 이외에도 일요일 아침 8시, 졸린 눈을 비비며 보던 <디즈니 만화동산>도 있었고, 일요일 낮, 전국노래자랑이 끝나고 방영해 주던 국산 만화들도 질리도록 봤던 기억이 난다. ( 이때 본 만화 중 하나인 2020 원더키디와 인공지능을 주제로 쓴 글도 있다. 링크 : 2023년에 다시 보는 2020 원더키디 )
재밌게 봤던 다양한 만화들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만화 중 하나는 바로 <영광의 레이서>이다. 어린 나이에 트랙을 질주하는 멋진 자동차들과, 이를 운전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너무나도 멋져 보였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 알게 되었다. 사실 이 만화가 일본 애니메이션 <사이버 포뮬러>였다는 것을. 기숙사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기에 남는 건 시간이었고, 정주행 한 애니 중 하나가 사이버 포뮬러 OVA 판이었다.
사이버 포뮬러는 미래의 가상 레이싱 대회를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다. 물론, 애니에서 설정한 미래의 시점을 우리는 이미 지났다. 주인공 ‘카자미 하야토’는 자신만의 머신을 타고 동료이자 적인 라이벌들을 제치고 최고의 레이서로 성장하는 이야기가 주요 줄거리이다.
미래 지향적 소재, 박진감 넘치는 레이싱, 멋지게 설계된 머신, 매력 넘치는 등장인물 등의 요소로 마니아층 사이에서 탄탄한 인기를 유지한 사이버 포뮬러. TV판은 크게 인기가 없었지만, 추후 나온 4개의 OVA 판이 대박을 치며, 아직도 머신의 프라모델이 팔릴 정도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드라이버와 함께 성장하는 AI, 아스라다
주인공 하야토가 타는 머신에는 ‘아스라다’라고 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다.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탑승자에 맞춰 최적의 레이싱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아스라다는 탑승자와 함께 성장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아스라다는 작중 최고의 시스템으로 평가받으며, 결국 하야토는 아스라다와 함께 사이버 포뮬러를 제패하게 된다.
아스라다는 하야토와 파트너를 이룬다. 단순 기계가 아니라 영혼의 단짝이란 말이다. 하야토가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워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음 깊숙이 있는 이야기까지 나누며, 하야토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동반자가 된 것이 바로 아스라다이다.
극 중 아스라다의 또 하나 특징은, 사람처럼 대화한다는 점이다. 참견과 충고를 좋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처음에는 하야토가 아스라다 때문에 화도 많이 낸다. 하지만, 점점 아스라다에 적응이 되며, 둘은 만담을 펼친다. 여주인공 ‘아스카’와 하야토가 키스를 할 때, 모른 척해 주는 센스까지 겸비한 아스라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긍정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하야토와 아스라다 사이 아닐까 싶다.
최고의 레이싱만을 추구하는 AI, 오거
하야토와 아스라다는 OVA 판이 거듭될수록 완전체로 거듭난다. 모든 대회를 휩쓸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제작진이 내세운 신의 한 수. 바로 ‘블리드 카가’라는 매력적인 조연을 주연으로 하는 OVA판 ‘SIN’을 공개한 것. 이전 시리즈에서도 하야토보다 인기가 좋았던 캐릭터인 카가가 주인공으로 나서며, 이 시리즈는 그야말로 빵 터진다. 사이버 포뮬러 마지막 OVA이기도 한 SIN이 아직도 회자되는 데에는 매력적인 주인공 카가가 일등 공신이다.
카가는 지금까지 주인공이었던 선의의 라이벌 하야토를 이기기 위해 무리수를 둔다. 바로 ‘오거’라고 하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머신을 운전하기로 한 것. 오거는 드라이버와 함께 성장하는 아스라다와 달리,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인공지능이다. 최고의 레이싱만을 추구하며, 드라이버가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주행을 할 경우 고집을 부리고 위험한 상황을 초래한다.
카가는 시즌 초반에는 오거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제로의 영역’이라는 기술을 사용하는 카가이기에, 극한의 한계까지 본인을 몰아붙여, 마지막 경기에서 결국 하야토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다. 아래 사진은 경기 전날, 하야토와 대화를 나누는 카가의 모습과, 마지막 바퀴에서 하야토를 역전하는 장면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극 중의 두 인공지능, 아스라다와 오거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론은 다르지만 둘 모두 최고의 레이싱을 추구하는 인공지능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오거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오거를 운전하는 레이서를 죽음에 빠트릴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오거를 개발하던 당시, 시운전 도중에 테스트 드라이버 2명이나 사망하고 만다. 이에 오거를 만든 제작자 역시 충격을 받아 자살을 한다. 이처럼 오거는 완성된 인공지능으로 자신의 목적인 최고의 레이싱을 위해서라면 드라이버도 아무렇지 않게 취급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SIN의 주인공 카가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무자비한 인공지능과 함께 우승을 차지하는 멋진 모습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오늘날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생각해 볼거리가 많은 결말이라 할 수 있다.
극 중 마지막 레이싱이 벌어지는 시점은 2022년이다. 이미 우리는 2022년을 지났다. 아직 아스라다와 오거와 같은 인공지능은 없지만, 인공일반지능(AGI)을 향해 인공지능은 무섭게 발전 중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아스라다와 오거의 이야기는 단순한 레이싱 애니메이션을 넘어, 인공지능과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아스라다는 드라이버와 함께 성장하며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하지만 오거는 완성된 시스템을 바탕으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존재이다. 두 인공지능은 각기 다른 접근 방식을 통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가 미래의 인공지능을 설계할 때, 아스라다와 같은 협력적이고 공감적인 인공지능을 인간의 파트너로서 고려해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다. 반면, 오거는 기술의 발전이 인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한다. 30년 전 애니메이션에서도 인공지능과 인간과의 협력과 상호 이해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균형 잡힌 접근 방식을 오늘날 우리는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슈퍼피포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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