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50번, 그리고 0원
스타트업을 시작하고 5년 동안 IR 발표를 50번 이상 했다. 데모데이, 투자사 미팅,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 크든 작든 투자자 앞에 서는 자리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결과는 투자 0원이었다.
그런데 그 회사는 지금 2026년 매출 100억을 목표로 하고 있다. 1년 차부터 매출이 발생했고, 적자인 해가 단 한 번도 없었다. 거의 매년 두 배 이상 성장했다. 투자를 못 받은 게 실패였을까.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50번의 경험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이 있다.
투자를 받은 대표들이 어떻게 투자를 받았는지 노하우를 공유하는 글은 많다. 그런데 나처럼 투자를 못 받은 대표가 왜 못 받았는지를 이야기하는 글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더 솔직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 싶어서 꺼내본다.
왜 투자를 못 받았을까

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매출은 나오고 있었고, 적자도 없었고, 성장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첫째, 우리 비즈니스 모델이 너무 다양했다.
화장품 제조 서비스로 시작했다가, 글로벌 화장품 제조 플랫폼을 표방했고, 4년 차부터는 자체 브랜드까지 만들었다. 투자자 입장에서 “이 회사가 결국 뭘 하는 회사야?”라는 질문에 한 문장으로 답이 안 나왔던 것이다. 특히 사업 초기엔 비즈니스 모델이 다양할수록 스토리는 흐려진다.
둘째, AC도 VC도 아닌 애매한 포지션에 껴 있었다.
초기엔 매출이 적어 AC 단계처럼 보였고, 매출이 10억을 넘기 시작하자 VC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미팅을 해보면 VC가 원하는 폭발적 성장 가능성을 어필하기엔 우리 회사 규모가 아직 작았다. VC가 베팅하기엔 너무 이른 단계였던 것이다.
셋째, 매출이 있으니 절박함이 없어 보였다.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매출이 나오고 있는 회사는 굳이 지금 투자하지 않아도 된다. 절박하게 투자가 필요한 회사가 아니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실제로 돌이켜보면 투자를 받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구체적인 그림이 없었던 것 같다. 절실함이 없었으니 설득력도 없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주변 대표님들이 투자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면 솔직히 부럽기도 했다. 신기하기도 하고. 나는 왜 안 될까,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IR은 결국 시장 논리다
50번을 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투자자는 좋은 사람을 찾는 게 아니다. 좋은 베팅을 찾는다.
나는 초반에 IR 피칭을 하면서 대표로서의 성실함과 꿈을 담았다. 매년 성장하고 있고, 적자 없이 운영하고 있고, 꾸준히 매출을 늘려가고 있다고. 그런데 그건 IR에서 무기가 되지 않는다. 초기 IR일수록 뾰족함이 중요했다. 투자자가 원하는 건 “지금 여기에 돈을 넣으면, 이만큼 불어서 돌아온다”는 확신이다.
성실함은 신뢰를 주지만, 베팅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IR은 어떻게 보면 시장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다. 내가 아무리 좋은 회사를 만들어도, 그 시점에 투자자들이 관심을 갖는 섹터가 아니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 반대로 트렌드가 맞으면 준비가 덜 된 회사도 투자를 받는다. 냉정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그래도 50번이 남긴 것들
투자를 못 받았지만, 그 50번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다.
IR을 준비하면서 내 사업을 가장 깊이 들여다보게 됐다. 우리 비즈니스 모델의 강점과 약점, 시장의 크기, 경쟁사 대비 우리의 위치. 투자자 앞에 서기 위해 준비했던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사업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수십 명의 투자자들과 나눈 대화에서 배운 것들도 있다. 시장을 보는 시각, 비즈니스 모델을 평가하는 기준, 성장의 방향. 투자를 받지 못했어도, 그 대화들은 분명 값어치가 있었다.
다만 초반엔 흔들리기도 했다. 투자자마다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어떤 투자자는 플랫폼에 집중하라 했고, 어떤 투자자는 제조서비스가 낫다고 했다. 사업 모델이 충분히 안착되지 않은 초기일수록 그런 말들이 크게 들렸다. 하지만 결국 내 비즈니스를 가장 잘 아는 건 나다. 그들의 말은 참고하되, 흔들리지 않고 가는 것이 답이었다. 그 조언들이 도움이 안 된 건 아니다. 진짜로 참고가 됐다. 다만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었다.

투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5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투자를 못 받은 것이 우리 회사를 더 단단하게 만든 것 같기도 하다. 외부 자금 없이 매출로만 성장해야 했기에, 한 번도 방만하게 운영할 수 없었다. 모든 결정이 생존과 직결됐다.
명상에서 ‘내맡김’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힘을 빼고, 흐름에 맡긴다는 뜻이다. 억지로 잡으려 할수록 멀어지고, 내려놓을 때 오히려 제대로 된 것이 온다는 것.
투자도 그런 것 같다. 다 때가 있다. 우리가 준비가 안 되어 있었을 수도 있고, 상황이 맞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제대로 된 파트너를 못 만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준비가 되고 적절한 시점이 됐을 때 기회는 온다. 투자를 못 받은 것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묵묵히 내 길을 가는 것이 답이다.
50번의 IR 끝에 내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이것이다.
투자를 받지 못했다고 사업의 방향이 틀린 것도, 비즈니스 모델에 메리트가 없는 것도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면서, 사업의 본질을 잃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 그게 결국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식이다.
철학하는 CEO 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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