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 전쟁의 기억,
그리고 클로드 페이블의 회수

 

1991년, 필 짐머만이라는 미국의 한 프로그래머가 PGP라는 암호화 프로그램을 인터넷에 무료로 풀었다. 평범한 사람도 정부나 기업이 들여다볼 수 없는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해주는 소프트웨어였다. 그는 좋은 일을 했다고 믿었다. 허나 미국 정부의 판단은 달랐다. 짐머만은 곧 연방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됐다. 죄목이 기묘했다. 무기를 허가 없이 수출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강력한 암호 기술을 ‘군수품’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미사일이나 전차와 같은 목록에, 몇 줄의 코드가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정 수준 이상의 암호화 기능은 외국으로 내보내는 것이 법으로 금지됐다. 넷스케이프 같은 브라우저조차 미국 안에서는 강한 암호를, 국경 밖에서는 일부러 약하게 만든 ‘수출용’ 암호를 써야 했다. 사람들은 이 부조리에 맞서 RSA 암호 알고리즘을 단 몇 줄로 압축해 티셔츠에 새겼다. 그 티셔츠를 입고 공항을 나서는 행위가 곧 ‘무기 밀수출’이 되는, 웃지 못할 시대였다. 짐머만은 말했다. “프라이버시가 불법이 되면, 오직 무법자만이 프라이버시를 갖게 될 것이다.”

수사는 1996년에 흐지부지 끝났고, 법원은 결국 소스코드도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는다고 판결했다. 2000년 무렵 암호 수출 규제는 대부분 풀렸다.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는 그 ‘무기’를 손에 쥐고 산다. 은행 앱을 열 때도, 메신저로 안부를 물을 때도. 한때 국가가 국경에서 막아서던 기술이, 이제는 막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한 일상의 기반이 된 것이다.

 

 

이 35년 전의 이야기를 다시 꺼낸 건, 지난 한 주 사이에 거의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번엔 암호가 아니라, AI 모델이다.

 

 

지난 화요일, 그러니까 6월 9일, 앤트로픽은 마침내 클로드 페이블(Fable) 5를 일반에 공개했다. 신전 안에만 있던 미토스(Mythos)급 능력을 안전장치를 덧대 시장 바닥으로 내려보낸, 바로 그 ‘우화’다. 사이버와 생물·화학 같은 위험한 질문이 감지되면 한 세대 전 모델인 옵푸스 4.8이 대신 답하도록 분류기를 붙였고, 같은 날 미토스 5도 글래스윙 승인 조직을 중심으로 제한 공개됐다. 페이블은 앤트로픽이 내놓은 가장 강력한 공개 모델로 소개됐다. 이에 대해 며칠 전 이 브런치에서도 글로 다룬 바 있다.






 

허나 우화가 거리에 머문 시간은 사흘이었다.

6월 12일 금요일, 페이블 5와 미토스 5는 모든 고객에게서 일제히 꺼졌다. 장애도, 품질 문제도 아니었다. 미국 정부가 앤트로픽에 수출통제 지시를 내린 것이다. 핵심은 단 한 줄로 요약된다. 미국 안이든 밖이든, 모든 외국 국적자의 페이블 5와 미토스 5 접근을 중단하라는 것. 앤트로픽 발표에 따르면 지시가 도착한 시각은 그날 오후 5시 21분, 우리 시간으로 6월 13일 새벽 6시 21분쯤이었다. 실제 서비스에서 수억 명의 국적을 즉시 가려내 일부만 막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회사는 준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두 모델을 통째로 내렸다. 다른 클로드 모델은 그대로 살아 있다는 점이, 오히려 이 조치의 표적이 무엇이었는지를 또렷하게 말해준다.

 

 
클로드 차단에 전세계가 난리! (출처: 매일경제)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그 외국 국적자 중 한 사람이다. 페이블로 최근 쓰던 논문을 위한 실험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며칠을 함께 실험을 함께하던 모델이, 토요일 새벽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사라졌다. 화면에는 오퍼스(Opus, 클로드 페이블 출시 이전 최신 모델)가 대신 앉아 있었다. 분명 훌륭한 모델이건만, 어제까지 나누던 호흡이 아니었다. 도구 하나가 사라졌다기보다, 함께 일하던 누군가가 말없이 자리를 비운 것 같은 허전함이라면, 과장일까.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사회관계망에는 오퍼스를 어떻게든 페이블처럼 길들여 보려는 사용자들의 안간힘이 넘쳐난다. 긴 프롬프트로 옛 모델의 말투와 사고 방식을 흉내 내게 하고, 우회로를 짜깁기하고, 서로의 비법을 공유한다. 사라진 우화의 환영을, 한 세대 전 모델 위에 덧씌우려는 일종의 강령술인 셈이다. 이 풍경은 묘하게 짠하다. 떠난 이의 말버릇을 흉내 내며 그를 붙들어 두려는 마음과, 어디가 그리 다른가.

 


 

다시 사건으로 돌아가자. 여기서 사태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그동안의 AI 수출통제는 반도체, 장비, 데이터센터처럼 만질 수 있는 물건을 겨눴다. 엔비디아의 칩이 어느 나라로 가느냐가 문제였다. 허나 이번에 통제 대상이 된 것은 칩도 서버도 아니다. 클라우드 너머에 떠 있는 특정 모델을 ‘쓸 권리’ 그 자체다. 1990년대에 몇 줄의 암호 코드가 군수품 목록에 올랐듯, 2026년에는 한 AI 모델의 사용 권한이 국가안보 자산처럼 다뤄진 것이다.

이 강경함의 뿌리를 보려면 몇 달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사실 2026년 들어 앤트로픽과 미 국방부의 사이는 이미 험악했다. 최대 2억 달러 규모의 군 계약을 두고, 앤트로픽이 자사 모델을 미국 시민에 대한 대규모 감시나 자율무기 운용에 쓰는 것은 막겠다고 버틴 것이 발단이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반응은 매서웠다. 2월, 정부는 앤트로픽 제품 사용 중단을 명령했고, 국방장관 피트 헤그세스는 이 회사를 ‘공급망 위험(supply chain risk)’으로 규정해 군과 협력업체로부터 사실상 퇴출시켰다. 6개월의 유예를 두되 블랙리스트에 올린 것이다. 발표 몇 시간 만에 경쟁사 오픈AI가 기밀망용 AI를 공급하는 국방부 계약을 따냈다는 소식이 따라붙었다. 앤트로픽은 법정으로 갔고,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이 한때 제동을 걸었지만 4월의 항소심은 그 가처분을 뒤집었다. 그러니까 정부와 앤트로픽은, 페이블이 나오기 한참 전부터 이미 서로를 향해 칼을 갈던 사이였다.

이에 대해서도 예전에 여기서 글로 다룬 바 있다.

 

 

 

그렇다면 방아쇠는 누가 당겼나.

 

보도는 한 회사를 가리킨다. 아마존이다. 액시오스와 로이터에 따르면, 아마존은 미토스·페이블 계열 모델의 탈옥, 즉 안전장치 우회 가능성에 대한 보안 우려를 백악관에 전달했다. 로이터는 아마존 최고경영자 앤디 재시가 이 위험을 행정부 고위 관계자에게 제기한 기술계 인사 중 한 명이었다고 보도했다. 묘한 대목이다. 아마존은 앤트로픽의 거대 투자자이자 클라우드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한 식구가 정부의 소맷자락을 잡아끈 셈이다. 같은 날 오후, 정부는 앤트로픽에 90분 안에 두 모델을 내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후의 풍경은 정부와 앤트로픽의 정면 충돌이다. 백악관의 데이비드 색스는 앤트로픽이 “탈옥을 고치거나 모델을 내리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아 수출통제를 발동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앤트로픽은 정부가 본 것이 좁고 보편적이지 않은 우회일 뿐이며, 시연된 것도 이미 알려진 경미한 취약점을 찾는 수준이었다고 반박했다. 회사는 한발 더 나아가, 출시 전 정부와 계획을 공유했고 명시적 반대도 없었다고 했다. 인터넷에 빠르게 도는 “정부가 경고했는데 앤트로픽이 무시하고 냈다”는 요약은, 지금 공개된 자료만으로는 단정하기 어렵다. 정부 지시서 전문도, 아마존의 보고서 원문도, 실제 로그도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더 정직한 정리는 이렇다. 출시 후 제기된 우려를 두고 정부와 회사가 그 ‘심각성의 무게’를 다르게 달다가, 끝내 수출통제라는 가장 무거운 추가 얹힌 사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아이러니를 짚지 않을 수 없다. 자충수의 그림자다. 지난 몇 달간 앤트로픽이 세상에 보낸 메시지의 핵심은 ‘이 모델은 너무 위험해서 함부로 풀 수 없다’였다. 미토스를 신전 안에 가둔 것도, 글래스윙이라는 제단을 쌓은 것도 그 서사 위에 서 있었다.

오픈AI의 샘 알트만이 이를 두고 “공포 기반 마케팅”이라 비꼰 것도 그래서다.

허나 공포를 팔던 회사가 마침내 우화 한 편을 거리에 내놓자, 정부는 그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정말로 그 위험 서사를 곧이곧대로 믿었기 때문일 수도, 아니면 몇 달째 눈엣가시였던 회사를 합법적으로 골탕 먹일 빌미로 삼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신들이 스스로 무기라 불렀으니 그 말 그대로 무기로 묶어주겠다는 듯이. 위험하다는 브랜딩이 책임감 있는 유일한 기업이라는 후광을 만들어 투자자를 끌어들였다면, 같은 브랜딩이 이번엔 자기 모델을 압류하는 법적 손잡이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블랙리스트에 올렸던 회사가, 이번엔 제 입으로 내건 명분에 발이 걸린 셈이다. 물론 능력이 실재한다는 사실과 공포를 판다는 비판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 모질라의 패치 423건은 마케팅이 아니라 기록이니까. 다만 위험을 강조해 쌓아 올린 탑은, 언제든 그 위험을 명분 삼은 손에 거둬질 수 있다. 이번 주가 그 증명이었다.

그래서 이번 사태가 던지는 질문은 모델이 탈옥됐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고성능 AI의 배포를 멈출 권한은 누구의 것인가, 그 판단의 근거는 어디까지 공개돼야 하는가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AI 경쟁의 질문이 ‘누가 더 좋은 모델을 만드는가’에서 ‘누가 어디에 먼저 심겨 있는가’로 옮겨갔다고 적었다. 이제 한 줄을 더 보태야겠다. 누가 그 모델의 스위치에 손을 얹고 있는가.

신전 안의 불은 도시를 지킨다. 허나 이번 주에 벌어진 일은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 시장 바닥으로 내려보냈던 우화마저, 국가가 다시 담장 안으로 거둬들인 것이다. 그런데 암호 전쟁의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안다. 국가가 무기라 이름 붙여 국경에서 막아 세웠던 그 기술은, 결국 막지 못했다. 티셔츠에 새겨지고 책에 인쇄되어, 끝내 모두의 주머니로 들어왔다. 수요는 언제나 장벽보다 끈질겼다.

그러니 진짜 물음은 페이블이 다시 켜지느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번 거리로 나왔던 우화를, 신전이 끝내 다시 가둬둘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 그 답을 적어 내려가는 첫 문장 앞에 서 있다.

 


최재운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