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50주년 특별전’ ‘70주년 생일기념전’ ‘100년 특별전’ 등 노장의 저력을 과시한 전시의 인기가 뜨거웠다. 사람들을 끌어모은 노장은 다름 아닌 지난 한 세기 동안 사랑받은 캐릭터였다. ‘헬로키티 50주년 특별전’에는 4개월 동안 20만 명이 몰렸다. ‘곰돌이 젤리’로 유명한 ‘하리보 골드베렌 100주년 생일기념전’에는 25만 명이 방문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외에 디즈니, 미피 등 몇 세대에 걸쳐 사랑받은 캐릭터들이 유행처럼 잇따라 전시를 열었다. 이렇게 역사 깊은 캐릭터들이 다시금 무대에 등장한 것은 그만큼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전 연령층에서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귀여움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캐릭터의 인기가 뜨겁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23년 기준 캐릭터 시장 규모를 16조 원대로 추산했다. 한 설문조사에서는 소비자의 76.1%가 지난 1년 동안 캐릭터 상품을 구매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최근 소비자들이 지갑 여는 것을 살펴보면 단순히 생김새가 귀여운 게 전부가 아니다. 순수한, 허술한, 앙증맞은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무장해제한다. 한마디로 ‘무해한’ 것들이 역설적이게도 힘을 발휘하는 시대, ‘무해력’의 시대인 것이다.
무해력의 첫 번째 모습은 순수함이다. 『트렌드 코리아 2025』에서 조사한 ‘2024년 10대 상품’에 꼽힐 만큼 판다 푸바오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어서 아기동물들도 주목받고 있다. 태국에서는 ‘무뎅’이라는 아기 하마가 전 국민적 인기를 얻어 국내에는 ‘태국의 푸바오’로 알려지기도 했다. 단순히 생김새가 귀여운 것뿐만 아니라 사육사가 만지려 하면 손을 물려고 하거나 몸부림치는 등 포악한 행동을 보이지만 그 모습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아 오히려 무해하다는 감정을 자아낸다.
어린 존재만 인기를 끄는 것은 아니다. 90세 할아버지와 30세 손자가 함께 여행을 다니는 콘텐츠로 인기 급부상 중인 유튜브 채널 ‘청춘이다’에서 특히 시청자의 사랑을 받는 대상은 90세 할아버지다. 표정에 큰 변화는 없는 듯하면서도 열심히 식사를 챙기거나 매일 운동을 챙겨 할 만큼 정정하지만 청력의 한계로 단어를 잘못 듣는 등 어딘가 엉뚱하거나 허술한 모습에 시청자들은 애정을 갖고 여행을 응원한다.
무해력은 또한 앙증맞은 사이즈에서 나온다. 레고 코리아는 어른 소비자를 공략하기 위해 미니어처 제품에 힘을 싣고 있다. 닌텐도 인기 게임 ‘동물의 숲’을 레고로 만든 시리즈는 출시 첫 달에 국내 레고 시리즈 중 매출 5위 안에 진입했다. 게임 속 캐릭터나 집, 가구, 아이템 등을 미니어처로 구현했는데 게임의 디테일한 설정을 최대한 살려 소비자의 감탄을 자아냈다.
이에 미니어처 굿즈를 선보이는 브랜드도 많아졌다. 공차코리아는 시그니처 메뉴를 미니어처로 만든 ‘공차 버블티 키링’ 3종을 출시했다. 실제 밀크티의 축소판답게 컵 내부를 액체로 채우고 타피오카 펄과 얼음까지 섬세하게 구현했다. 농심이 일본에서 출시한 굿즈 컬렉션도 비슷하다. 일본 캡슐토이 브랜드 가샤폰과 협력해 출시하는 컬렉션으로, 농심의 주요 용기라면 제품을 미니어처로 만들었다. 미니어처의 매력은 디테일에서 느끼는 만큼 용기면에 양념분말 미니어처까지 붙여 소장 욕구를 자극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 사회에서 언제부터인가 ‘무해하다’는 표현이 자주 쓰이고 있다. 원래 ‘인체에 해가 없다’는 의미에서 화학제품이나 기술 영역에서 많이 나온 단어인데 사람과 콘텐츠에도 적용되더니 이제는 일종의 매력을 나타내는 말이 됐다. 그만큼 무해함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너무 유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의 유해함도 자주 쓰는 말에서 느껴진다. 온라인상에서 ‘긁혔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신경을 긁다’ ‘속을 긁다’에서 사용하는 ‘긁다’란 표현을 피동형으로 바꾼 말인데, 누군가 심기가 불편해지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 ‘긁혔네’ 하고 조롱하듯 쓰곤 한다. 이외에도 ‘나락 간다’ ‘신상털기’ 등 온라인상에서 난무하는 위협적인 표현 역시 개인이 사회에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쏟아지는 자극도 사람들이 유해성을 느끼는 원인이다. 지난해 트렌드로 ‘도파밍’을 소개했는데 곧바로 뒤이어 반(反)트렌드로 ‘안티도파민’ ‘디지털 디톡스’가 등장했다. 그만큼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와 도파민을 유도하는 디지털 기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다.
도파민을 경험하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게임에서조차 ‘힐링’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꽃을 심는 게임, ‘피크민 블룸’도 그중 하나다. 이 게임은 ‘포켓몬고’와 같은 증강현실 게임으로 밖을 돌아다니며 피크민이라는 캐릭터를 모은다. 피크민은 머리에 새싹을 달고 있는데 물을 주면 꽃이 핀다. 이 꽃을 길에 심을 수 있다. ‘하찮다’는 표현이 나올 만큼 무해한 느낌의 피크민 캐릭터도 인기지만 사용자들이 많이 다닌 길에는 꽃이 무성하게 피기 때문에 일종의 연대를 느끼기도 한다. 타인의 존재를 위협으로 느끼는 시대에 이 게임이 더욱 무해력을 갖는 이유다.
기업이나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소비자와의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귀여운 캐릭터를 만들며 무해력을 활용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의 ‘조아용’은 2019년 리뉴얼해 현재의 모습이 됐다. 굿즈 판매뿐만 아니라 현재는 교통안내 표지판이나 종량제 봉투 등 일상 곳곳에 적용되고 있다.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뿐만 아니라 조직문화 차원에서 활용할 수도 있다. 현대위아는 조직문화를 친근하게 녹여낸 캐릭터 ‘도담이(도전하는 담비)’를 만들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이모티콘으로 제작했다.
이제 무해력은 단순히 디자인적 요소로 치부하면 안 된다. 사실 ‘귀엽다’는 감정은 요즘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필요하다. 작고, 순수하고, 허술한 존재는 나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며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그래서 귀여움을 ‘권력 감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개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아진 시대, 불안함을 다루는 하나의 방법으로 무해력을 활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 결핍된 무해함을 채우는 것일 테다.
권정윤 님의 브런치와 <병영에서 만나는 트렌드>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