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한 아이돌 그룹이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쳤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아이돌 콘서트가 특별히 주목할 뉴스인가 싶지만 이유가 있다. 그들은 ‘플레이브(PLAVE)’라고 하는 버추얼 아이돌이기 때문이다. 버추얼 아이돌이란 실제 사람이 아닌, 가상현실(VR·Virtual Reality) 기술로 구현한 캐릭터로 구성된 아이돌을 의미한다.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진행된 플레이브의 콘서트는 전석 매진됐다. 콘서트에 온 팬들은 스크린에 등장한 플레이브 멤버 공연을 보며 떼창을 했다고 한다.
3차원(3D) 홀로그램도 아니고 2D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가상인물이 화면 밖까지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더현대서울에서 한 달 동안 진행한 버추얼 아이돌 릴레이 팝업 행사에는 10만 명이 다녀갔으며 매출은 무려 70억 원을 넘겼다고 한다. 가상 인플루언서가 등장한 것은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신기함’ 때문에 화제를 끌고 대중에게 잊혀진 과거 사례와 달리 요즘 버추얼 아이돌은 확실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대체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사실 요즘 사랑받는 버추얼 아이돌의 기반에는 실존 인물이 존재한다. 사람의 움직임에서 모션을 읽어내 가상 이미지로 구현한다. 하지만 캐릭터 이미지가 사람을 완벽히 재현하기 때문에 인기있는 것은 아니다. 외형보다도 실제 인물로부터 우러나오는 매력에 흥미를 느끼며 팬과의 상호작용이 있기에 살아 있는 존재로 느끼는 것이다. 기술은 여기에 몇 가지 장점을 추가한다. 예를 들어, 외모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으며 ‘본체’가 공개되지 않는 한 현실의 인물이 갖는 사생활 문제에서도 자유롭다는 것이다.
요즘 1020세대, 젊은 소비자들은 버추얼 이미지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도 이유일 것이다. 오히려 애니메이션 세계에 뛰어든 듯한 비현실적 느낌을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게임 이미지나 가상 아바타에 익숙해 있으며 본인의 모습도 인공지능(AI) 프로필 이미지로 꾸미는 요즘 사람들에게 현실이냐, 가상세계냐 구분 짓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가상세계는 현실의 연장선이며 ‘부캐’를 만들 듯 놀이처럼 즐기는 것이다.
가상과 현실의 결합은 엔터테인먼트 영역에 국한하지 않는다. 기술이 미치는 파장이 현실의 친구, 연인, 가족, 직장동료 등 인간관계에도 닿고 있다. AI가 만들어내는 이미지, 페르소나, 캐릭터가 현실의 관계와 뒤섞이며 증강현실처럼 ‘진화’하는 새로운 관계 양상을 ‘AR 관계’라 부를 수 있다. 원래 AR 기술은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기술을 의미한다. 완전한 가상현실을 만드는 VR과 달리 현실에 기술을 덧씌우는 것을 말한다. 오프라인에서 거리를 돌아다니며 게임을 즐기는 ‘포켓몬 GO’라는 게임이 AR기술을 활용한 대표적 사례였다.
AR 관계의 첫 번째 양상은 관계의 부족함을 생성형 AI로 채우는 것이다. 최근 아이돌 팬들의 경우 자신이 좋아하는 ‘최애’ 아이돌의 평소 말과 행동, 성격을 학습시킨 AI 페르소나를 만들어 이들과 대화하며 논다. 당연히 실제 아이돌과 대화하는 것만큼의 감동은 없겠지만 자신이 애정하는 마음을 쏟으며 재미를 찾는 것이다.
관계 맺기를 도와주는 사례도 있다. 외국에서는 연애 코칭 AI가 여럿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Love Leetr’라는 서비스는 AI 알고리즘을 활용해 어떤 주제에도 적절히 공감하는 메시지를 제안하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때 ‘로맨틱하게’ ‘장난기 있게’ ‘진지하게’ 등 원하는 톤에 맞게 메시지를 작성해 주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온라인 데이팅이 활성화돼 있는 만큼 매칭 성공률을 높여주는 프로필을 작성해주는 서비스도 있다. 자신의 정보를 입력하면 어떤 점이 이성에게 어필될 만한지 재구성해주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를 도와주는 것뿐만 아니라 관계의 정리를 도와주는 서비스도 각광받고 있다. 일명 애도 테크(Grief tech)라 불리는 서비스는 가족과의 사별, 연인과의 이별 등 사람들이 가장 심리적 어려움을 크게 느끼는 애도의 기간을 잘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직접 몇 가지 인터뷰 질문에 답변을 녹음하고 사진을 업로드해 놓는다거나, 혹은 남겨진 가족들이 고인의 성격, 사진 및 영상을 입력하면 AI가 이를 분석해 이별한 인물의 페르소나를 형성, 슬픔을 달랠 수 있도록 대화를 지속해 준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거나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신 AR관계라 이름 붙인 것처럼 기술이 현실의 관계를 더 편리하게 혹은 더 재미있게 만든다. 나아가 기존에 하기 어렵던 것을 기술이 가능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나이와 국적의 제약 없이 새로운 페르소나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마치 SF 영화에서 그려지듯 휴머노이드가 가족이나 연인을 대체하는 것만큼 극적인 변화는 아니라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다만 AR 관계의 낙관적인 전망만을 바라보는 것은 조심해야 할 듯싶다. 책 『고립의 시대』의 저자 노리나 허츠 교수는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은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온라인상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은 음식으로 치자면 일종의 패스트푸드와 같다. 당장의 허기를 채워줄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영양불균형을 초래하는 패스트푸드처럼 양질의 관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술이 제공하는 효용에 익숙해지다 보면 과거로는 돌아가기 어렵다. 전화하지 않고 음식을 주문할 수 있게 해주는 플랫폼의 발달로 전화를 걸면서 겪어야 하는 미세한 심리적 마찰은 줄어들었지만 그 매끄러움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은 ‘콜 포비아’(call phobia ; 전화를 무서워하는 것)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작은 마찰이 발생하는 일상적인 상호작용에도 견디기 어렵게 됐다. AR 관계로 인해 우리는 슬로푸드와 같은 깊이 있는 관계를 잃는 것은 아닐까?
권정윤 님의 브런치와 <병영에서 만나는 트렌드>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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