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되자마자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면허가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학원에 등록하면 실습 전에 지루한 이론 강의를 먼저 수강해야 합니다. 다행히 저는 분위기를 잘 이끌어주시는 노련한 강사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수업 중간중간 농담을 해주시는데, 그때 강사님이 해주셨던 농담 중에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 절반 이상은 아마 면허를 따는 순간 병에 걸릴 거예요. ‘멀어’ 병이라고… 앉아서 발만 얹으면 어디든 가게 되는 마법을 경험하면 평소 걸어서 갔던 모든 곳들이 다 멀게 느껴져요. 산책을 하러 10분 거리 공원에 가는데도 차를 몰고 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사람은 한 번 편리함을 경험하면 그전으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운전을 한 번 경험하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는 목적을 이룰 다른 수단들은 거의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요. 자전거를 타고 가면 더 경제적이고 운동도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자동차의 편리함을 선택합니다. 서울 일부 지역에서는 지하철이 훨씬 빠르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자동차의 편리함을 선택합니다. 기름값이 오르면 ‘연비를 높이는 운전 스킬’을 배워서라도 자동차의 편리함을 선택합니다.
마케팅을 ‘디지털 광고’라고 생각하는 것도 ‘멀어’ 병의 일종입니다. 매체 광고의 편리함을 한 번 경험하면 ‘내 타깃 고객에게 메시지를 전한다’는 목적을 이룰 다른 수단을 떠올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고객을 직접 만나 관찰할 수 있음에도 디지털 광고의 편리함을 선택합니다. 때로는 종이 전단지를 돌리는 게 타깃 고객에게 더 빠르게 닿을 수 있는 수단임에도 디지털 광고의 편리함을 선택합니다. 광고비가 오르면 ‘CPC 낮추는 스킬’을 익히려고 할 뿐 디지털 광고 이외의 다른 수단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초기 스타트업은 마케팅에서 검색 광고, SNS 광고 등의 비중을 줄여야 합니다. 때에 따라 아예 포기해도 괜찮습니다. ‘우리 제품을 가장 잘 사용해 줄 고객을 만나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를 맺는다’는 마케팅 본연의 목적에 집중하면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시간과 체력으로 매체에 드는 비용을 대체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지식을 전하면서 고객과 만날 수 있다면 강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분야의 지식을 정리해서 강단에 서야 합니다. 아파트 단지에 우리 고객이 모여 있다면 경비 아저씨와 친분을 쌓고 전단지를 돌리는 노력도 기꺼이 해야 합니다. 그게 남들이 보기에 ‘멋진’ 방식이 아니어도요.
편리함을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
직접 해보지 않고 대행사를 찾는 것도 ‘멀어’병의 일종입니다. 편리함을 조금만 포기하면 초기 스타트업의 마케팅 업무 대부분은 내부 팀원들이 스스로 해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PR업무 중 하나인 기사 배포를 예로 들어볼까요? 대행사를 쓰면 건당 몇 만 원의 비용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아래 과정을 거치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기사를 배포할 수 있습니다.
1. 기사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마케팅 메시지 및 구체적인 내용 나열 2. ‘기사 작성하는 방법’을 검색해 기사의 구조를 파악한 뒤 그 구조에 맞게 위 내용 편집 3. 우리가 발행하려는 기사와 비슷한 결의 기사를 썼던 기자님들의 이름과 연락처 리스트업 4. 메일 내용에 작성한 기사, 함께 들어갈 매력적인 이미지를 넣고 파일로 원본도 함께 첨부 5. 아침 8시 전후로 도착할 수 있도록 메일 예약 발송 (메일함을 열었을 때 상단 노출이 목표) 6. 보내는 시간대, 제목, 내용 등의 퀄리티를 개선하면서 위 과정 반복 7. 발행된 기사 확인 후 종료 |
기자님들은 모든 기사를 본인의 취재만으로 작성하지 않습니다. 구조에 맞게 쓰인 글, 지나친 회사 홍보가 아닌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정보’로 여겨지는 뉘앙스, 매력적인 이미지 등의 요소들이 제보 메일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면 그 글을 그대로 배포하기도 합니다. 글이 너무 좋다면 자신의 일을 덜어준 마케터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도 있겠죠.
대행사를 거치지 않으면 마케터가 업무 경험치를 그대로 흡수합니다. 기사를 작성하면 글쓰기 경험치를 얻습니다. 마케터의 글쓰기 역량은 이후 조직에 더 많은 기회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블로그나 브런치를 꾸준히 운영해 고객에게 우리를 알릴 수도 있고, 매력적인 채용 공고를 작성해 뛰어난 동료들을 모을 수도 있죠. 이후 매출이 늘어 정말 대행사를 쓸 일이 생겼을 때 협업을 훨씬 더 원활하게 이끌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인플루언서와의 제휴 업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직접 섭외하면 불필요한 수수료 지출을 아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플루언서들의 콘텐츠를 분석하게 되고, 우리와 핏이 맞는 콘텐츠는 어떤 콘텐츠인지도 고민하게 되죠. 단순히 ‘돈 드릴 테니 콘텐츠 만들어주세요’가 아니라 협업하는 상대의 입장에서도 매력적인 기획을 제안할 수 있다면 섭외 비용 자체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큰 비용을 쓰지 않고 내부의 역량을 키우면서 타깃 고객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 타깃 고객들이 모이는 행사가 있다면 그곳의 연사로 나설 방법을 찾아보세요
- 타깃 고객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 그들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을 달아주고, 공유할 가치가 있는 정보를 꾸준히 공유하세요 (업계 지식을 충분히 활용)
- 박람회 등의 큰 행사가 있으면 그 근처 지하철 역에서 센스 있는 인쇄물을 제작해 나눠주세요 (평범한 전단지가 아닌 와우 포인트가 적용된 인쇄 콘텐츠)
-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 (경쟁사 브랜드, 제품 등) 키워드를 검색해 그 대안에 불만을 느낀 고객에게 직접 연락해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주세요
- 지인의 회사에 무료 맞춤 데모/샘플 상품을 제공해 주고 피드백을 받아보세요
직접 만나보면 더 생생하게 보입니다
매체 광고나 대행사를 활용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이런 수단들이 더 효율적일 때도 분명 있을 겁니다. 마케팅 수단의 선택지를 의도적으로 넓히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애초에 돈을 쓰는 방법만 있다고 생각하면 ‘돈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찾는 것에 생각이 갇히게 됩니다. 돈을 쓰지 않는 방법도 있음을 알고, 좀 더 열린 관점에서 고민해야 고객을 만날 다양한 방법들을 고민하게 되죠.
고객과 직접 만나려는 시도는 효과적인 마케팅 메시지의 발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다짜고짜 제품을 권하면 거부감이 생길 거라는 건 누구나 압니다. 몰랐더라도 상대의 불쾌한 표정을 몇 번 마주하면 금방 깨닫게 되죠.
그럼 자연스럽게 ‘고객에게 말을 거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첫인사, 상대가 쉽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이야기 등을 준비하게 되죠. 우리 제품의 어떤 포인트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는지, 어떤 형태로 제안을 건네었을 때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객이 거부감을 느끼는 포인트를 캐치해 우리 제품을 개선할 아이디어도 떠올릴 수 있고요.
오프라인에서의 이런 경험은 디지털 마케팅을 설계할 때도 도움이 됩니다. 사람들이 반응할 광고 소재 (흥미로운 첫인사나 마음을 여는 이야기) – 랜딩 페이지 (흐름이 연결되는 제품 소개) – CTA (매력적인 제안)에 필요한 내용들이 저절로 떠오르게 되죠. 오프라인에서나 온라인에서나 대화를 하는 주체는 결국 우리와 고객이니까요.
디지털이 주는 편리함에 매몰되면 가끔 ‘사람’을 잊게 됩니다. 좋은 관계를 이어가야 할 화면 너머의 고객이 아니라 화면에 나오는 숫자에만 집착하게 되는 거죠. 허위 광고나 과장 광고, 낚시성 제목과 썸네일, 상대의 간절함과 불안감을 자극하는 메시지까지. 어쩌면 마케팅에서 이런 얄팍한 전략들이 넘쳐나게 된 건, 상대를 직접 보지 않아도 되는 디지털 환경이 만들어낸 부작용의 일부가 아닐까요?
고객을 직접 만나도 똑같이 전할 수 있는 메시지, 떳떳하게 권할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에 집중해 보세요. 당장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1타 강사의 마케팅 스킬이 아니라 우리가 고객에게 줄 수 있는 가치를 탄탄하게 다지는 것이 마케팅 성과를 개선하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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