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이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가 무엇인지 각자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해의 대상이 누구든, 무엇이든 이해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경험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되도록이면 머리와 가슴에 담아 어떻게 해서든지 ‘나의 말과 표현’으로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야만, 내가 이해를 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밝힌 적이 있지만 글을 쓰는 이유도 스스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틀린지, 옳은지 그른지를 알기 위해 쓰는 중입니다.
글을 쓰면 그 글을 통해서 이해한 바가 무엇인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그러한 이해를 통해 부족하거나 엇나간 부분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여 보충 및 보완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형태를 ‘글답게’ 쓰면, 나 말고 다른 이들에게 내가 이해한 바를 설명할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생각도 정리정돈이 되니 정확히는 일석삼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덕분에 주로 다루는 커리어 또는 비즈니스 영역에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게 누구든, 무엇이든, 영역 내에서 수많은 사례들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경험하면서 나름대로 설명 가능한 논리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물론 완벽할 수 없습니다. 설명가능하다고 했을 뿐이지, 그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를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설명 가능하면, 이해 가능하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 것이죠. 설명하는 주체는 이해했다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어떤 영역에 대해 이해도 100% 전체를 가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결국 나 자신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이를 타인에게 옮기는 과정에서도 모두 Noise는 있을 수밖에 없고 오해와 왜곡은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나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나의 이해를 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내 이해가 타인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내 설명력만 좋아질 뿐, 내 설명을 들은 상대방이 충분히 어떤 이해를 가졌다고 보이는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음을 최근에 깨달았습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 오가는 메시지와 그 사이의 Noise가 있지만, 말하는 이의 메시지(의도)가 온전히 전달되어 듣는 이의 어떤 변화로 나타나야만 제대로 이해되었다고 볼 수 있음을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포함한 대다수가 하는 일이 누가 누구에게 이해를 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코치인 저는 코칭을 받는 분들을 위해, 기업은 고객을, 기업 속 여러 이해관계자는 각자가 자신과 조직이 펼치고자 하는 바를 위해 계속해서 누군가의 이해를 구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비즈니스에 빗대어 보면, 말하는 이는 기업, 듣는 이는 시장 속 고객입니다.
기업은 고객이 있는 시장에 직/간접적으로 ‘우리 것 좀 사주세요.’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사는 사람만 사고, 사지 않는 사람은 사지 않습니다. 대신에, 시장 속 누군가 구매행위를 했다는 것만으로 기업의 이해가 시장 속 고객에게 전달되었고 그 기업의 고객이 시장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많은 데이터 <1) 전달하는 메시지, 2) 전달되는 과정, 3) 전달이 되어 변화된 시장 및 고객의 반응, 4) 그 반응으로부터 이어지는 고객의 제3의 반응, 5) 그 반응으로부터 퍼지는 시장 내 또 다른 반향 등>를 세심히 살피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장에 가장 크게 외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외침에 얼마나 반응이 왔는지에 대한 결과(매출과 이익)만을 살핍니다. 따라서,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영역에 내 이해를 보기 좋게 떨어뜨리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절대 그럴듯한 전달만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안 되는, 못하는, 할 생각이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이들과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미리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득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최소한 피아식별과 취향과 스타일, 더욱 풍성한 표현 등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해를 구하지는 못했어도 여러 사람의 이해를 구하는 경험을 해본 것만으로도 시도를 한 자신에게는 많이 남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해를 구해야 하는 누군가와 어떤 이야기가 있다면 논리 보다 각자의 신념 문제일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을 다해 내 이해가 전달되어, 상대방으로부터 의도한 반응이 오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모든 부분에 그러기는 힘들겠지만, 최소한 내가 일을 하는 분야에서만큼은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가장 옳은 것이 될 수 있도록 논리적으로 중무장하며, 그것이 믿음이 되어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는 구체적인 생각과 행동의 변화이며, 그 변화가 꾸준히 이어질 때 비로소 어떤 이해가 제대로 전달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해를 전하고, 그 이해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때까지’ 할 수 있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를 구할 때 여전히 ‘전달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정확히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여 그 메시지를 들은 이가 어떤 변화(반응)를 보이면 좋을지를 정하지 않고 멋들어진 표현을 하는데 집중합니다. 그게 일대 일이건, 일대 다수이건 비슷합니다. 그때마다 형태와 형식에 치중하고, 내용에는 소홀히 합니다. 그렇게 해서 과연 누군가의 이해를 구할 수 있을까요?
그런 어려운 일을 단박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값진 일입니다. 그런 값진 일을 해내며 그와 관련한 경험을 쌓아가고, 고스란히 그 가치가 나 자신에게 축적되어 가는 것입니다. 진짜 능력은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타인의 이해를 구해야 합니다.
내가 설명할 수 있는지 없는 지가 이해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그 끝에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야 하고, 이를 토대로 그 사람으로부터 기대한 꾸준한 반응을 이끌어내야 하고, 그걸 위해서는 다시 또 내가 이해한 바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어떤 이해(관계)로 연결되고, 그 과정이 켜켜이 쌓이게 되면 더욱 돈독한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모두가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태도이자, 영역에 따라서 대단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함께 일하는 누군가의 이해를 끊임없이 구하며, 제대로 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세요.
저도 저에게 코칭 받는 분들의 제대로 된 성장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게 저를 성장시키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직스쿨 김영학님의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