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던 일에 색깔만 입힙니다
많은 분들이 ‘브랜딩’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것들을 떠올립니다. 코카콜라가 매년 실행하는 엄청난 스케일의 캠페인, 배달의민족의 멋진 사옥 인테리어와 센스 넘치는 기업문화, 유명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하는 화려한 UX/UI 디자인 같은 것들이요.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에도 급급한 스타트업, 소규모 기업들은 이런 큰 예산을 브랜딩에 투자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이런 것들을 해낼 수 있어야만 고객들에게 우리 브랜드를 잘 인식시킬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브랜딩’을 하고 있습니다
브랜딩은 쉽게 말하면 ‘기업이 하는 모든 행동에 정체성을 입히는 것’입니다. 예산을 따로 편성해서 새로운 걸 추진하는 게 아니라, 매일 하던 일에 우리만의 색깔을 입히는 거죠. 마케터가 아닌 분들을 포함해 여러분 모두는 이미 ‘브랜딩’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따로 의식하지 않을 뿐이죠.
평소 주변 친구, 동료들이 여러분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있을 겁니다. “얘는 완전 미니멀, 심플 그 자체야.” 이런 평을 듣는 사람이 있다고 해볼까요? 단순히 이런 단어 몇 개로 설명할 수 없는, 더 섬세하고 구체적인 캐릭터가 내면에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은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개인적인 영역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다니는 소품, 사는 집의 인테리어, 매일 입는 옷, 선호하는 식사 메뉴, 나누는 대화의 주제, 말투와 행동처럼 오랜 시간 봐온 것들을 통해 그를 파악하는 거죠.
그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미니멀을 추구하게 된 그만의 ‘스토리’가 있을 겁니다. 어렸을 땐 저렴한 가격의 다양한 물건을 사는 것을 좋아했던 소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잔뜩 사놓은 물건들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해 잘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는 경험을 반복했겠죠. 어느 날 본인이 버린 쓰레기들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로 인해 낭비되는 자원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소년은 그때부터 다짐합니다. ‘앞으로는 꼭 필요한 물건만, 가장 오래 쓸 수 있는 걸로 사자.’ 그 뒤로 몇 년간 그의 행동에 서서히 변화가 찾아옵니다. 선호하는 옷의 브랜드가 바뀝니다. 집 안을 꾸미는 가구를 선택할 때의 기준이 바뀝니다. 공간을 정리하는 습관이 생깁니다. 일을 할 때마저도 단순함과 효율성을 추구하게 됩니다. 모든 일상에 내 다짐이 담긴 나만의 스타일이 스며듭니다. 주변 사람들은 어린 시절 그 소년의 다짐과 생각, 그로 인해 쌓여온 행동들이 완성한 성인 남성의 모습을 보고 ‘미니멀’, ‘심플’이라는 단어로 그를 표현합니다.
이렇게 한 개인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인식되는 과정을 이해하면, 기업이 브랜드를 만들고(다짐), 열심히 일하고(행동의 축적), 그 과정을 통해 고객에게 인식되는(브랜딩) 과정 역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큰 기업들이 굳이 예산을 들여
브랜딩을 하는 이유
마케터가 브랜딩을 한다는 건, 각자의 색깔을 가진 개인들이 일하는 ‘기업’이 만든 브랜드를 하나의 색깔을 가진 존재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은 기업은 오히려 이 일을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내부 인력이 적은 만큼 구성원들의 색깔도 다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업은 보통 성격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세우기 때문에 구성원들의 색깔을 브랜드에 그대로 입히기만 해도 브랜딩이 어느 정도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구성원의 수도 늘어납니다. 기업 구성원들의 색깔도 점점 다양해지죠. 배달의민족은 유쾌한 브랜드지만, 배민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유쾌한 사람들은 아닐 겁니다. 내성적인 사람도 있고, 진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도 있겠죠. 그럼에도 우리가 마주하는 배민의 디지털 광고, 지하철역에 있는 지면 광고, 앱 내의 카피들은 모두 유쾌하고 재밌습니다. 배달의민족 마케터들이 브랜드의 색깔을 통일성 있게 유지하면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규모가 큰 기업은 세상에 내는 목소리도 큽니다. 그 큰 목소리에 일관성이 없어지면 고객들의 혼란도 그만큼 커집니다. 기업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죠. 그래서 큰 예산을 따로 들여 따로 브랜딩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겁니다. 디지털 광고, 지면 광고, 카피처럼 일상적인 일에도 일관된 정체성을 적용하면서요.
작은 기업의 마케터가 해야 할 일
작은 기업은 별도의 예산을 편성하지 않아도 충분히 브랜딩을 할 수 있습니다. 당장 웹사이트를 갈아엎지 않아도, 하던 페이스북 광고와 네이버 검색광고를 끄지 않아도 됩니다. 일관된 정체성을 입히면 되죠.
어떤 정체성을 입혀야 할까요? 한 개인이 어떤 경험, 의식의 전환을 통해 나만의 정체성을 갖게 되듯이, 기업이 거쳐온 길을 유심히 살펴보면 브랜드의 정체성도 보입니다. 창업자가 처음 이 기업을 만들었던 이유, 초기 멤버들끼리 일했던 스타일, 나눴던 대화들, 첫 제품의 탄생 과정 등. 따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도 그간의 행보가 담긴 언론 기사들이나 대표자가 회사에서 해왔던 말들을 되새겨보면 충분히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경험을 거친 기업은 어떤 외모, 어떤 말투, 어떤 가치관을 갖게 됐을지 생각해 보세요.
‘하던 일에 정체성을 적용한다’는 게 막연하게 느껴진다면 이미 잘 성장한 브랜드를 분석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최근 제가 옷을 구매했던 브랜드 ‘안다르’는 어떤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인지 살짝 엿볼까요?
나이키가 도전과 승리를 추구한다면 안다르는 여유로움과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입는 ‘스포츠 의류’보다는 일상, 휴식, 레저 활동에 필요한 의류를 만드는 브랜드라고 본인들을 소개하고 있네요. 저는 일하면서 입을 편한 옷을 찾다가 티셔츠를 구매했는데, 제가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너 이미지에 나오는 모델들도 모두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극강의 퍼포먼스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길을 거닐며, 요가를 즐기며 몸과 마음의 여유를 느끼고 있네요. 옷을 입었을 때의 착용감과 기능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카피 역시 이미 여유로움을 찾은 누군가가 건네는 따뜻한 제안처럼 느껴집니다.
웹사이트 배너가 옷의 기능성을 강조했다면 광고에서는 옷을 입는 상황을 좀 더 강조했습니다. 광고 메시지는 짧은 순간에 상대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타깃 고객의 일상과 더 밀접하게 닿아있어야 하죠. ‘통기성이 좋다’ 보다는 ‘햇볕 아래 라운딩’이 고객의 일상에 더 가깝습니다. 무더운 여름에도 골프를 포기하지 못하는 남성들은 ‘이거 나한테 필요한데?’라고 바로 느낄 수 있죠.
상세페이지에서도 안다르는 뛰지 않고 걷습니다. 들어온 고객에게 자신들이 만든 제품에 대해 차분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하죠. 제품의 장점을 설명하는 목적도 모두 똑같습니다. ‘이 옷을 입으면 당신의 몸과 마음이 더 여유로워져요.’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옷이 가벼우니까 몸은 더 여유로워집니다. 땀으로 축축해지지 않으니까 마음도 더 여유로워집니다. 안다르에서 산 옷을 입으면 일도, 운동도 나만의 속도로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타인의 성격을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은 자아가 사라져 결국 무너집니다. 안다르는 ‘여유로움’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브랜드가 하는 모든 일에 여유로움과 편안함, 차분함을 입혔습니다. 웹사이트부터 소재, 이미지, 카피까지 모두 일관된 정체성을 유지합니다. 이제 다시 우리 기업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만의 메시지, 그 메시지를 표현하는 우리만의 방식을 찾아야 하죠.
브랜드 스토리 기획, 웹사이트 배너 제작, 광고 소재 제작, 상세페이지 제작…. 전부 마케터가 일상에서 원래 하던 일입니다. 지금부터 이 일에 우리만의 정체성을 입혀보세요.
마케터의 모든 일에 그 기업의 정체성이 입혀지면, 브랜딩은 ‘따로 시간과 돈을 들여서 하는 일’이 아니라 ‘일을 했더니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 결과’가 됩니다. 방향성을 내부에서 찾았다면, 그 정체성이 마케터 본인과도 맞다면 따로 브랜딩을 의식할 필요조차 없어지죠.
성격이 잘 드러나는 사람은 그 성격과 잘 맞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기업도 똑같습니다. 정체성이 명확하게 드러나면 자신과 잘 맞는 고객을 만날 확률이 높아집니다. 자신과 잘 맞는 고객과 자주 만나면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할 수 있는 확률도 자연스럽게 높아집니다.
마케터에게, 혹은 고용한 마케팅 에이전시에게 여러분의 기업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우리 기업은 어떤 다짐과 함께 시작됐는지, 구성원들은 어떤 스타일로 일하는지, 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절대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대표는 지금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거창하게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 사이에서 더 선명하게 기억될 겁니다.
박상훈 (플랜브로) 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