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로, 네 시작은 부드러웠으나 네 끝은 아주 거칠고 강렬할 것이다.
“이런 사연을 들으면 죄책감을 느낀다”
영화 ‘비트’에서 정우성의 모습을 보고 담배와 오토바이를 배웠다는 팬의 사연을 듣고 배우 정우성이 한 방송매체에서 팬에게 한 말이다.
영화 ‘비트’는 여러 명장면을 만들어 냈지만 극 중에서 정우성이 친구로 나오는 유오성이 조직으로부터 배신을 당해 숨을 거두자, 말보로 레드를 유오성의 입에 물려주고 복수를 위해 혼다 CBR 600F2을 타고 혈혈단신으로 수십명의 적진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덕분에 수많은 미래의 바이커들과 애연가들을 양성했다는 말이 돌 정도로 당시 영화 ‘비트’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 많은 담배 중 왜 하필 말보로 레드였을까?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말보로 레드의 이미지가 ‘절대적인 마초’이기 때문은 아닐까. 말보로 레드는 시중에 판매되는 담배 중 가장 독한 담배로도 잘 알려졌다. 타르는 담배 연기에서 니코틴과 수분의 질량을 제외한 나머지 유해물질의 복합체인데 타르의 함량이 곧 담배의 목넘김과 맛을 좌우한다. 실제로 말보로 레드는 8mg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렇게 강렬한 수컷의 전유물이자 상징과도 같은 브랜드이지만 사실 아침드라마만큼이나 반전이 있는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다.
1920년대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의 충격으로 미국 젊은이들의 미래가 불안과 우려가 가득했던 시기였다. 상처받고 지친 사람들은 전쟁 트라우마를 지우기 위해 재즈와 담배를 찾았다. 이런 시대적 불안감은 참전 대상이었던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불안한 미래 때문이었는지 여성들은 당장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고 현재를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몇 년 전 젊은이들이 한번 사는 인생 지금을 즐기자는 ‘YOLO’를 인생 모토로 삼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여성들은 옷, 화장품 등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고 암울하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 흡연자 수도 점차 늘어났다.
당시 여성 흡연자들의 애로사항 혹은 시쳇말로 ‘페인 포인트(pain point·불편함을 느끼는 지점)’가 있었다. 바로 입술과 닿는 담배의 흡연부분이 립스틱에 쉽게 물드는 점이었다. 이러한 여성 흡연자들의 불편함을 간파한 미국의 담배 제조사 필립 모리스는 1924년 여성을 타깃으로 립스틱에 물들지 않는 담배를 생산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전 세계적인 담배 브랜드 ‘말보로’의 시작이었다. ‘말보로’라는 이름은 초창기 필립모리스 사에서 처음 런던에 세운 공장 부위의 지명에서 착안하였다.
필립 모리스는 말보로의 주요 고객인 여성 흡연가들의 호감과 지지를 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중 하나가 흰색 담배물부리가 립스틱에 의해 물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말보로 담배물부리의 색을 흰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꾼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5월처럼 부드러운’이라는 의미의 ‘Mild as May’라는 브랜드 슬로건을 내세우고 May와 발음이 비슷한 Mae West라는 여배우를 광고모델로 발탁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시장점유율은 1%에 그쳤다. 여성 흡연자들을 위해 론칭한 말보로 브랜드는 도대체 왜 실패한 걸까? 말보로 담배가 설정한 부드러운 이미지는 브랜드가 목표로 하는 시장의 잠재적 수요를 반영하였지만 예상보다 소비자층이 견고하지 못한 탓에 판매를 확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50년대 담배가 폐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필립 모리스는 당황하지 않고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포착하며 광고대행사 레오버넷의 도움을 받아 말보로를 리브랜딩하기로 결심했다. 여성을 위한 담배가 아닌 터프가이를 위한 브랜드로 말이다. 남성들 역시 건강을 우려한 나머지 기존의 필터가 없는 담배 대신 필터가 있는 담배를 더 선호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위해 포장 역시 플립형 박스로 바꾸고 기존의 얇고 부드러운 글자체 대신 두껍고 진한 검정색으로 강인한 남성의 매력이 물씬 풍기도록 했다. 처음에는 브랜드 캠페인에 공사 일꾼부터 마부, 잠수부, 농부, 그리고 선장까지 남성적인 면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이미지를 투영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깊은 눈빛, 거친 피부, 사이드가 올라간 카우보이 모자, 털로 덮인 팔뚝을 소유하고 온몸으로 거친 일상과 수컷향을 발산하는 카우보이로 남성 흡연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매출은 5,000% 이상 상승했고 미국 시장점유율 1%였던 말보로 담배는 전 세계 담배 시장의 4분의 1을 점령하더니 결국 41조의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은 세계 1위 브랜드가 되었다.
‘그래서 필립 모리스가 여성 흡연자들을 포기했냐고?’
1960년대 말 여성을 출산·육아·가사에서 해방하라는 여권신장운동이 점차 관심과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가정에서 해방되는 것이 여성의 해방이며 남녀평등이라는 생각이 혁명적으로 여성들 사이에 번져갔다. 이 틈을 타 1968년 필립 모리스는 여성 흡연자들을 위한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하였다. 바로 ‘버지니아 슬림‘이다. 흡연하는 여성들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표현한 필립 모리스의 대담하고 위험한 도발이 브랜드 슬로건에서 느낄 수 있다.
“You’ve come a long way, baby(먼 길을 왔구나, 자기야).”
해당 콘텐츠는 Jimmy Cho님과 모비인사이드의 파트너쉽으로 제공되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