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아직 런던에 있는가
첫 직장에서 대리를 달던 해에 사표를 냈다. 누군가는 부러워할 만한 대기업 대리라는 타이틀을 달고도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나의 일상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편안했고, 그 안에서 나는 한동안 제자리에 고여 있었다. 더 이상 성장하고 있지 않다는 불안감은 긴 슬럼프로 이어졌다. 이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환경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했다. 그렇게 안정된 직장과 편안한 일상을 버리고 영국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했다.
해외 취업에 대한 환상, 현실과 얼마나 일치했을까?
영국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손에 쥔 뒤, 해외 취업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런던으로 향했다. 높은 연봉, 만족스러운 워라밸, 경력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는 수평적 기업 문화, 글로벌 인재들과의 건전한 협업, 그리고 남는 시간에 실컷 유럽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여유까지. 내가 상상하던 영국의 회사 생활은 파라다이스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과연 실상은 어땠을까?
해외 취업에 대한 나의 환상은 어느 정도 현실과 일치했다. 평균적으로 영국 직장인은 한국 직장인보다 더 나은 워라밸을 누리고, 보다 수평적인 기업 문화와 높은 자율성이 주어지는 환경에서 일한다. 나만 해도 영국에서 3년 넘게 일하면서 야근을 한 날은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드물고, 휴가는 상사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신청하며, 팀에 나보다 더 경력이 높은 사람이 있더라도 당당하게 의견을 내고 프로젝트를 리딩 한다. 이런 부분에서 해외 취업에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그러나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는 혜택은 없는 법이다. 업무 시간이 짧다는 건 그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일을 끝내야 한다는 뜻이지, 그만큼 일을 적게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 외국 기업 직원들의 절대적인 업무량이 한국에 비해 적다면 어떻게 그들이 우리나라 기업보다 훨씬 높은 매출액을 달성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건 업무 시간이 아닌 업무의 효율성이다. 또한 수평적인 기업 문화와 높은 자율성은 경력이 높든 낮든 각자 제 몫을 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돌아온다. 성과가 안 좋은 경우 동료들에게 냉정한 평가를 받으며, 한국보다 훨씬 쉽게 해고를 당하기도 한다.
또한 일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영국 회사에도 존재한다. 기업 문화가 수평적이라고 해서 상사와의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며, 자율성이 높다고 해서 늘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 글을 지금까지 읽어온 독자 분들이라면 이 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글로벌 인재가 아니라 안드로메다 인재랑 일하더라도 회사에서 겪는 크고 작은 충돌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파라다이스 같은 직장 생활은 없었다. 모든 일에는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기 마련이고, 해외 취업도 마찬가지다. 처음 런던행을 결정했을 무렵의 나처럼 순진하게 장밋빛 미래만 상상하고 해외 취업을 결정한다면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해외 취업에 확실한 메리트가 있긴 하지만, 그만큼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다는 걸 알고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취업 한 번쯤은 해볼 만한 이유
나는 원래 2년의 워킹홀리데이 비자 기간이 끝나면 귀국할 예정이었다. 영국에서 파란만장한 첫 1년을 보내고 퇴사를 고민하던 시점에, 이직이 아닌 귀국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첫 회사에서 해외 취업의 좋은 점뿐 아니라 힘든 점도 충분히 겪어 봤으니, 그냥 1년 동안 좋은 경험 했다 치고 일찍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2년 뒤에 귀국은커녕 워킹홀리데이 기간이 끝나고도 회사에서 비자 스폰서십을 받고 4년째 아직 영국에 있다. 도대체 나는 왜 아직 런던에 있을까?
스스로에게 내가 아직 런던에 있는 이유가 뭔지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커리어’다. 커리어 개발 관점에서 보면 런던이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메리트가 꽤 크다. 특히 개발자로서 런던은 정말 성장하기 좋은 환경이다. 런던이 아니더라도 실리콘밸리처럼 개발자들이 많이 모이는 도시라면 비슷한 장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개발자의 입장에서 본 런던 취업의 장점을 세 가지 선정해 보았다.
1. 확연히 많은 이직 기회
세계적인 기업과 유망한 스타트업이 모여드는 런던은 엄청난 기회의 도시다. 회사의 수가 많을 뿐 아니라 회사 규모와 산업 분야 또한 다양해서 이직하고자 할 때 옵션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스타트업에 가면 대기업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런던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다. 뛰어난 인재를 모셔가기 위해 대기업만큼의 연봉을 제시하는 스타트업도 많기 때문에, 비교적 연봉에 제한받지 않고 원하는 규모의 회사를 골라 갈 수 있다.
2. 실력이 향상되는 만큼 확실히 늘어나는 보상
런던에서는 연봉의 빈부격차가 큰 편이다. 이 말인즉슨 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그만큼 훌륭한 연봉을 받고, 실력이 뒤처지는 사람은 낮은 연봉에 머무른다는 뜻이다. 물론 이직의 빈도와 연봉 협상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주변 지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에 비해 연봉 인상률이 확연히 높은 편이다. 노력해서 실력을 향상하는 만큼 확실하게 보상이 늘어난다는 점은 꾸준히 공부하고 성장할 동기부여가 된다.
3. 다문화적 환경에서 얻는 넓은 관점
런던은 다양한 배경의 인재들이 모이는 다문화적 도시다. 하나의 문화에만 익숙해지다 보면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운데, 여기는 정말 각양각색의 문화가 공존하기 때문에 보다 광범위한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유럽, 아시아, 중남미, 중동 등 전 세계 각국에서 온 동료들과 함께 일하다 보면, 내가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듣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부딪히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내 생각과 관점을 넓혀갈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다.
물론 해외 취업에는 좋은 점만큼 힘든 점도 많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문화도 생소하고, 언어마저 다른 타지에서 오로지 내 역량 하나로 살아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익숙함과 편안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원하는 것을 이뤄낸 경험은 엄청난 성취감으로 돌아와 내 안에 단단한 기둥이 되었다. 낯선 런던에서 내 자리를 찾으려 아등바등하던 시간 속에서 나는 막대한 성장을 이루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언제까지 런던에 살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이때의 경험은 오랫동안 내 안에서 강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이게 해외 취업을 한 번쯤은 해볼 만한 진정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시리즈는 여기 까지지만, 나의 영국 생활은 아직 ing다. 여기에 적은 이야기는 런던에 와서 첫 1년 동안 겪은 일들이다. 사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기에 꼭 글로 남기고 싶었다. 글을 한 편씩 쓰면서 다시 그 시기를 되돌아볼 수 있어서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내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은 분들에게 닿아서 누군가에게는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될 수 있어 기뻤다. 댓글과 라이킷으로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또 다른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엄지현 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