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쌓인 시간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아시는 분들은 잘 아시는 회사일 수 있는데 얼마 전에 오케이몰이라고 하는 한 명품 커머스 회사의 실적이 발표가 되었다. 2021년 매출 2,886억 원, 영업이익 214억 원.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하신 분들이 많을 것 같다. 명품 커머스 쪽 상황을 자세히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으니 조금만 첨언을 해보자면…
최근 수많은 IT 스타트업들이 명품 커머스 업에 뛰어들면서 명품 커머스 시장은 출혈 경쟁을 피할 수 없는 레드 오션이 되어 버렸다. 작년까지 트렌비, 발란, 머스트잇 등 명품 커머스 스타트업들은 연예인 모델을 필두로 엄청나게 공격적인 마케팅을 진행해왔다.
결과는 어땠을까? 트렌비는 매출 217억 원을 달성했지만 -330억 원의 적자를 봤고 발란은 매출 512억 원을 기록했지만 영업 적자는 -186억 원이 발생했다. 머스트잇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매출 199억 원을 달성했음에도 영업 적자는 -100억 원으로 큰 규모의 적자를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트렌비, 발란, 머스트잇 등 신흥 강자들과 대비해서 성장률도 결코 뒤지지 않으면서 214억 원의 영업 이익을 달성한 오케이몰의 실적은 실로 놀라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금만 눈을 돌려서 패션 시장을 봐도 비슷한 사례를 하나 찾을 수 있다. 패션 커머스 시장은 춘추 전국 시대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정말 많은 스타트업들이 기록적인 성장률을 보이면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섹터 중 하나다.
여성 패션의 최강자 지그재그는 작년에 거래액 1조 원으로 전년 대비 30-40% 가량 성장하며 매출도 652억 원을 기록했지만 영업 적자도 -379억 원으로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 이 뒤를 추격하는 후속 주자들의 상황은 더 좋지 않아서 에이블리는 935억 원의 매출을 달성하고도 -695억 원의 적자를 봐야 했고, 브랜디는 1262억 원의 매출과 함께 -481억 원의 영업손실도 함께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 와중에 스트릿·캐주얼 패션에서 압도적인 1위 사업자인 무신사는 어떠했을까? 무신사는 매출도 4,024억으로 그 규모나 성장성 측면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더 대단한 것은 656억 원의 영업이익이다. 특히 스타일쉐어, 29CM를 인수하면서 이들의 영업손실을 그대로 끌어안고도 흑자를 기록한 점을 고려하면 꽤나 눈에 띄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긴다. 모두가 출혈 경쟁과 영업 적자를 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케이몰, 무신사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이례적인 실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모두가 출혈 경쟁 속에서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는 와중에, 어떻게 이 회사들은 성장과 이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던 것일까?
오케이몰의 경우에는 타 경쟁사들과 달리 오로지 매입을 중심으로 하는 사업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른 경쟁사들의 경우에는 중개와 매입을 병행하는 반면, 오케이몰은 오로지 매입만 한다.
매입을 하게 되면 일반적으로 중개를 하는 것보다는 더 큰 마진을 가져갈 수 있다. 재고 리스크를 지는 만큼 더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사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 팔릴만한 물건을 매입을 통해 저렴하게 사오게 된다면, 남들보다 더 좋은 가격 경쟁력을 가지고도 좋은 이익률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럼 무조건 매입이 장땡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매입을 하게 되면 재고 리스크를 지는 만큼 잘 팔릴만한 상품을 선별하는 능력이 없고 판매량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면 팔리지 않은 물건이 모두 재고로 쌓여 오히려 큰 손실을 보기도 한다.
또한 팔릴만한 수량 안에서 최선의 가격을 가지고 와야 가격 경쟁력과 마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데 물량과 가격 협상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우 가격적인 측면에서의 메리트도 사라져 버린다. 또한 세상 모든 상품을 다 매입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매입만 하는 사업 모델은 상품 다양성 측면에서도 불리하다.
괜히 다른 경쟁사들이 매입과 중개를 병행하는 것이 아니다. 매입은 그만큼 경험도 많이 필요하고, 제대로 된 팀이 정말 치밀하게 운영해야 제대로 된 성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설픈 매입은 오히려 영업 적자만 더 키우는 폭탄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케이몰은 어떻게 이렇게 잘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오케이몰은 무려 2000년에 설립된 회사다. 처음부터 명품을 팔았던 건 아니지만 명품 사업을 시작한지 굉장히 오래되었고, 10-20년이 넘는 시간만큼 현재의 사업 모델을 가장 완벽하고 효과·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조직적 시스템과 인력적 역량이 견고하게 다져져 있는 것이다.
이는 오케이몰이 2000년 창립 후 단 1번의 투자 유치도 없이, 단 1번의 영업 손실도 없이 현재까지 성장해온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오케이몰은 정말 시간과 노력만으로 단 1년의 기복도 없이 꾸준히 그 역량과 시스템을 만들어 온 것이다.
이는 요즘 스타트업들이 대량의 투자금을 받은 뒤 적자를 감수하고 빠른 성장을 추구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전략이다. 어떻게 보면 돈으로 시간을 사는 전략인데, 이러한 Blitz Scaling이 분명 좋은 전략이기는 하지만 사업 구조와 내실이 제대로 다지면서 성장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것도 사실이다. 한때 커머스 세계를 풍미했던 티몬, 위메프의 사례만 봐도 사업 구조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로 성장만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사업 구조와 내실을 제대로 다지면서 성장하지 못한다면,어느 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될 수도 있다.
무신사도 마찬가지다. 무신사가 혜성처럼 최근에 등장한 유니콘 기업인 줄 아는 사람도 많은데, 무신사 역시 무려 2001년에 세워진 회사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언론에 알려진 것처럼 무신사는 ‘무진장 신발 사진이 많은 곳’이라는 한 신발 덕후의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에도 바로 커머스를 했던 게 아니라, 도메스틱 패션 브랜드들의 브랜드 마케팅을 도와주는 사업 등을 여럿 거치며 현재의 모습까지 오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신사를 패션 커머스 업체로 알지만, 정작 커머스를 제대로 시작한 건 5년 남짓 정도밖에 안됐다. 그렇다면 커머스를 시작하기 전에 흘려보낸 10년이 넘는 시간들은 정말로 무신사에게 아무로 의미가 없었던 실패의 시간들이었던 걸까?
절대 그렇지 않다. 어떻게 보면 무신사가 패션 유니콘 기업으로서 지금과 같은 기라성 같은 존재감을 가지게 된 건 무신사가 2001년부터 보내온 그 누적된 시간과 경험의 힘이기 때문이다.
무신사는 IT 패션 플랫폼으로서 중개를 한다. 그러면서 매입도 하고, 무신사스탠다드라는 이름의 PB도 제작한다. 무신사스탠다드는 그 어떤 남성 SPA보다도 위력적인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25-30%라는 엄청난 수수료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핵심 브랜드들이 무신사에 독점으로 입점해있거나 단독으로 핵심 상품을 제공한다. 말 그대로 못하는 것이 없고, 무신사가 스트릿·패션 브랜드에 만들어놓은 아성은 다른 경쟁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함부로 치고 들어갈 수가 없는 정도이다.
무신사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무신사의 시간이 말해준다. 5년 남짓한 시간 동안 빠르게 성장한 IT 플랫폼들은 IT 역량은 좋을 수 있지만 무신사가 가지고 있는 다른 역량들까지 이 짧은 시간에 흡수할 수는 없었다. 매입, 제작, 브랜드 마케팅, 단독 입점 계약 등 무신사만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노하우와 경험은 무신사가 가진 20년의 시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누적된 시간과 경험은 때로 경쟁사를 압도하는 그 모든 차별적 경쟁력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하루하루 시간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루하루 꾸준히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 더 무섭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유니콘 기업들, IPO 상장사들이 어느 하루 아침에 벼락 성공을 한 것 같지만 대부분 1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견뎌내고 거기까지 다다른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상장 기업이 설립부터 IPO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균 7-10년 이상이다. 우리가 잘 아는 토스도 무려 2012년에 세워진 회사다!)
오랜 시간을 감내한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단기간에 성장했다고 무조건 약한 것도 아니다. (사실 최근에 성장한 많은 기업들은 절묘한 전략과 최고의 프로덕트로 단기간에 성공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시간과 경험을 지속적으로 오랜 기간 쌓으면서 성공까지 해낸 기업은 어떤 경쟁 상황에서도 정말로 강하고 견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작고 가벼운 술책으로는 쉽게 이들을 이기기 어렵다.
이러한 법칙은 꼭 크고 대단한 것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일상 생활, 커리어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그것이 취업이든, 진학이든, 승진이든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성과들은 대부분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긴 과거의 시간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일어난 결과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단순한 운을 넘어 오랜 시간과 노력으로 이를 달성한 사람이라면, 이후에 어떤 부침이 있더라도 남들보다 쉽게 이겨내고 더 좋은 성과를 계속해서 만들어나가는 경우가 많다.
주변의 크고 작은 성과들은 대부분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긴 과거의 시간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일어난 결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책을 출판하고 글을 1천 개를 쓰는 건 어렵지만, 하루에 1개씩 3년을 쓰다 보면 그게 1천 개의 글이 되고 출판의 기회로 만들어준다. 처음부터 유니콘 기업을 만드는 건 어렵지만, 내가 좋아하는 신발 사진을 매일 같이 모으고 치열하게 노력하고 기회를 확장해나가다 보면 그것이 유니콘 기업의 씨앗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삽질인 것 같아도 그 삽질에서 쌓인 실패의 경험과 노하우들이 더 큰 성공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어느 하루 아침에 갑자기 너무 큰 걸 바라니까 모든 것이 다 어려워 보이는 것은 아닐까? 매일 조금씩 한 걸음을 내딛다 보면 다 가게 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중간에 엉뚱한 방향으로 가거나 실패를 하더라도, 그것이 쌓여서 나를 더 나은 곳에 데려다 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시간과 경험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는 밑바탕이 될 것이다.
해당 콘텐츠는 Man on the Grid님과 모비인사이드의 파트너쉽으로 제공되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