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사정 상 세 명의 직원을 정리해고하게 되었습니다.”
영국 스타트업에 입사해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전 직원이 모이는 회의에서 들은 동료들의 해고 소식이었다. 지난 분기의 성과가 예상보다 많이 저조했다는 게 공식적인 이유였다. 어두운 표정으로 정리해고의 대상이 된 직원들의 이름을 발표하는 CEO의 공지에 우리 팀 리더인 S의 이름이 나왔다. 믿을 수 없어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귀를 의심했지만, 나처럼 벙쪄 있는 있는 팀원들의 얼굴을 보니 제대로 들은 모양이다.
정리해고를 당한 세 명의 직원 중 리더급은 S 뿐이었다. 그의 평소 업무 능력을 보면 정리해고를 당할 만큼 일을 못한다거나 근무 태도가 나쁜 건 전혀 아니었기에 이 소식이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더 놀라웠던 이유는 그가 우리 팀의 팀장일 뿐 아니라 이 회사의 CTO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사람을 귀띔조차 없이 갑자기 자른다는 게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팀원들이 좋아하는 상사, 그러나 회사는 반기지 않는 리더
S는 팀원 모두가 좋아하는 상사였다. 팀원들을 믿고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기회를 주는 팀장이었고, 단기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편법보다는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정공법을 고수하는 리더였다. 하지만 빠르게 성과를 내야 하는 스타트업의 특성상 그의 리딩 스타일은 회사가 원하는 바와 잘 맞지 않았다. 회사의 입장도 이해는 갔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스타트업에서 S 같은 리더는 살아남을 수 없는 걸까. 팀원들이 하나같이 좋은 상사라고 얘기하는 사람과 회사의 사정이 나빠졌을 때 가장 먼저 내쳐지는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니.
내가 이 회사로 입사를 결정한 건 S의 영향이 컸다. 면접에서부터 볼 수 있었던 그의 친절하면서도 프로페셔널한 모습이 좋은 인상을 주었고, 이 바닥에서 20년 이상 탄탄하게 경력을 쌓아 온 그에게 배울 점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입사 후에도 S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배우며 성장했고, 앞으로도 그와 함께 일할 날들이 기대됐다. 그런데 입사 한 달 만에 이렇게 허무하게 그가 해고를 당하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보다 쉬운 영국의 정리해고
내 경험 상 한국에서 정리해고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객관적인 데이터를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해고를 규제하는 규정이 많고, 해고할 때 들어가는 비용(해고 전 예고 비용 + 해고 수당)도 OECD 국가 중 2위로 매우 높다고 한다. 이 때문에 회사의 일방적인 해고 대신 스스로 나가고 싶게끔 갑자기 지방으로 발령을 내리거나 남들이 기피할 만한 일을 준다는 치사한 일화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반면에 영국의 해고 비용은 한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금전적인 부분만 본다면 한국보다 세 배로 쉽게 직원을 해고할 수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회사가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직원에게 계속 기회를 주며 끌고 가는 것보다는 약간의 해고 비용을 감수하고 “You are fired”를 외치는 편이 더 편하고 쉬울 것이다.
우리 회사는 쉬운 방법을 택했다. 팀원들에게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팀장을 해고하는 방법을. 회사에서 직원을 해고하는데 무슨 상의가 필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팀장이라는 직무의 특성상 팀을 이끄는 역량도 업무 능력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 역량은 팀원들의 피드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데, 우리 팀 팀원들에게 S의 리더십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면 모두 좋은 얘기를 했을 것이다. 이런 피드백조차 묻지 않고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독적으로 그의 해고를 결정한 회사에게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정리해고 이후의 후폭풍
정리해고에는 후폭풍이 따른다. 특히 이 경우와 같이 회사의 성과 부진이 정리해고의 이유라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남은 직원들은 동료를 잃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직업 안정성에 위협을 느낀다. ‘다음 분기에도 성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는 내가 해고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불안함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런 불안감 속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직원들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회사의 약점 또한 쉽게 드러난다. 스타트업은 직원들에게 회사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내밀며 회사 가치를 어필한다. 그러나 한 분기 성적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정리해고라는 마지막 카드까지 꺼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회사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음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회사의 창창한 미래를 기대하던 직원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준다. 이 때문에 능력 있는 직원들이 다른 회사로 눈을 돌리고 퇴사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일이다. 따라서 아무리 해고 비용이 적게 든다고 해도 정리해고는 결코 쉽게 결정할 만한 일이 아니다.
정리해고의 대상이 팀장이었던 우리 팀은 전에 없던 위기에 봉착했다. 우리 팀원들은 모두 경력이 고만고만한 미드 레벨이었기 때문에 팀장 없이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다. 한 팀원은 우리가 일을 더 많이 해서 성과를 낼 테니 S를 해고하지 말아 달라고 회사에 부탁까지 했다. 우리는 그만큼 간절했다. 하지만 냉정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이런 순진한 부탁이 먹힐 리 없었고, 결국 S는 우리 팀을 떠나게 되었다. 즐겁기만 하던 영국에서의 회사 생활 중에 맞은 첫 위기였다.
엄지현 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