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선 점심도 일도 자유롭게
영국 회사의 점심시간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정해진 점심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동시에 우르르 몰려 나가곤 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5분만 더 일찍 나가면 줄을 안 서도 될 텐데 왜 다들 같은 시간에 나갈까?’ 하지만 나도 어느새 그들과 함께 그 긴 줄의 끝에 서있었다. 모두가 정시에 나가는데 나 혼자 일찍 일어나기가 눈치 보였고, 튀는 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그저 남들 하는 대로 하는 게 마음 편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국 회사에서는 정해진 점심시간이 없다. 그냥 본인이 점심을 먹고 싶을 때가 점심시간이다. 무언의 약속인 양 대부분의 사람들이 12시와 2시 사이에 점심을 먹기는 하지만, 그 외 시간에 밥을 먹으러 나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오전에 일이 많으면 점심을 조금 늦게 먹기도 하고, 오후에 중요한 미팅이 있으면 평소보다 일찍 먹기도 한다. 누가 언제 점심을 먹는지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덕분에 점심시간에 엘리베이터 앞에 긴 줄을 설 일은 없다.
점심을 먹는 방식도 모두 제각각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팀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영국에서는 팀과 별개로 각자 알아서 먹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도시락을 싸와서 자리에서 먹는 사람도 있고, 간단한 음식을 테이크 아웃해서 회사 카페테리아에서 먹는 사람도 있고, 밖에서 외식을 하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타이밍이 맞으면 팀원들과 같이 점심을 먹기도 하지만, 매번 같이 먹는 걸 룰로 정해놓지는 않는다.
자유도 높은 업무 방식
점심시간은 영국 회사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예시이다. 영국에서는 각자 알아서 자유롭게 점심을 먹듯, 일도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한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한 첫 주에 내 상사가 이번 주에는 무슨 일을 할 거냐고 물어서 의아해 했던 기억이 있다.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질문 아닌가? 첫 주부터 무슨 일을 할지 직접 얘기해보라니…’라고 생각하며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췄다. 이처럼 영국의 상사들은 무슨 일을 하라고 일일이 정해주지 않는다.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을 해 나갈지에 관한 결정은 각자의 몫이다.
이러한 자유도 높은 업무 방식에는 개개인이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상사는 팀에서 내야 할 결과물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만 구체적인 방안까지는 제시하지 않으므로 팀원들은 이를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보통 리더급의 직원들에게만 이런 결정권이 주어지는 반면, 영국에서는 비교적 낮은 연차일 때부터 주도권을 가지고 일할 기회가 많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리서치를 하고, 각기 다른 접근 방식의 장단점을 비교해보며 직접 프로젝트 구현 방안을 설계하는 경험은 성장을 위한 값진 밑거름이 된다.
직원들의 업무 자유도가 높은 회사일수록 직원들의 성과 및 만족도가 높다는 통계가 있다. Harvard Business Review의 기사에 따르면, 업무 결정권이 주어진 직원은 그렇지 않은 직원에 비해 평균 10~20% 성과와 만족도가 높다. 특히 혁신 부문에서는 두 그룹이 두드러진 차이를 보였다. 이 때문에 많은 영국 회사에서는 어느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직원들에게 좀 더 자유도를 주는 문화를 추구한다.
실제로는 그 이상의 차이를 느꼈다. 상사가 나에게 주도권을 주었다는 건 내 전문성을 믿고 맡겼다는 뜻이라는 걸 알기에, 그 믿음을 져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프로젝트에서 직접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나니 이 프로젝트에 더 애정을 쏟게 되었고, 이후의 업무 생산성은 자연스럽게 따라 올라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대로 리더의 권한을 주면 리더처럼 일하게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런 업무 방식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다소 어렵고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도 한국 회사에 다닐 때는 선배들의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했고, 중요한 업무는 경력 많은 선배들이 리드했기 때문에 나에게까지 결정권이 내려오는 일은 드물었다. 따라서 처음 영국 회사에서 프로젝트에 중요한 결정을 해야 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아직 연차가 낮은 나를 믿고 맡겨준다는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혹시라도 나의 부족함으로 팀에 민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이럴 때 혼자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기보다는 다른 팀원들과 대화를 통해서 방향성을 찾아 나가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상사가 나에게 주도권을 주었다고 해서 꼭 혼자 모든 걸 해결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좀 더 경력이 많은 팀원에게 조언을 구해도 되고, 다양한 의견을 모아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채워도 된다. 이것 또한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과정 중 하나일 뿐이며, 오히려 모든 걸 혼자 결정할 때보다 다른 팀원들과의 토론을 통해서 방안을 찾아나갈 때 더 뛰어난 결과물을 낼 수 있다.
통계 결과대로 이런 방식으로 일을 하고 나서 내 업무 만족도도 높아졌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실제로도 그랬다. 처음에는 주도적으로 일을 한다는 게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지만, 스스로 방향성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역시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확신은 높은 업무 만족도로 이어졌다.
그게 내가 영국에 온 이유였다. 굳이 익숙하고 편한 환경에서 벗어나서 여기까지 온 건, 힘들더라도 더 많이 성장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업무 자유도 높은 이 회사에서 내가 바라던 성장을 빠르게 이뤄내고 있었다. 영국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 문화는 그리웠지만, 상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업무 방식은 그립지 않았다.
엄지현 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