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일했을 때는 매년 연말이 되면 승진 인사가 발표됐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누가 승진할까?’보다 ‘누가 승진에서 누락될까?’에 조금 더 쏠렸다. 그만큼 승진 여부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결과였다. 가령 내가 다니던 회사의 경우 한국의 다른 대기업들과 비슷하게 대략 4년을 기준으로 진급을 했다. 사원 4년, 선임(대리) 4년, 책임(과장) 8년의 루트를 밟게 되고, 그 이상 수석(부장)을 거쳐 임원이 되려면 그만큼 회사에서의 노력과 인정이 필요했다.
지금은 한국 기업의 직급 체계나 조직 구성이 내가 근무했던 때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직급에 따라 책임과 권한이 일괄적으로 정해지는 부분이 없지 않았고, 책임(과장) 이상의 직급이 되면 누구나 팀의 관리자 역할을 맡는 것이 일반적으로 커리어를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본인이 싫다고 고사를 하더라도, “곧 익숙해질 거야, 잘해봐”라는 주변의 인사를 들을 뿐, 어떻게든 그 일을 해야만 했다. 그것이 그 위 단계의 커리어로 올라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루트이기도 했다.
첫 번째 트랙: 탁월한 문제 해결자 ‘IC’
지금 회사에서 내가 맡고 있는 직급은 ‘디자인 리드(Design Lead)’다. 한국의 직급 체계 중에서 지금 내 직급과 딱 맞는 직급은 없는 것 같다. 이 직급의 역할을 정의하자면, 한마디로 ‘혼자 놔둬도 몇 가지 일을 알아서 잘 돌아가게 할 사람’ 정도. 물론 이 ‘일’에는 디자인뿐만이 아닌 의사결정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 웬만한 것을 결정하고, 결정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디자인 리드가 수직적 의미의 직급(rank)이라면, 수평적 의미의 직군(track)은 IC(Individual Contributor)다. IC란 자신의 전문 영역을 가지고 근무하는 직군을 의미하는데, 주로 디자이너, 개발자 등이 대표적인 IC 직군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곳 실리콘밸리 디자이너들의 직함을 보면 보통 ‘IC(track) + 숫자(rank)’가 조합된 형태다. 즉 대학을 갓 졸업한 주니어 디자이너는 ‘IC 2’ 혹은 ‘IC 3’이 되고, 시니어 디자이너는 ‘IC 4’, ‘IC 5’다. 매니저 이상 직급은 ‘IC 6’, ‘IC 7’이 되는 식이다. 레벨링과 타이틀은 회사마다 다를 수 있지만 큰 틀은 모두 비슷하다.
회사가 IC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한 가지, 탁월한 개인적 역량이다. 이 역량은 IC 레벨이 높아질수록 스스로 증명해 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IC 직군에게는 전문 분야 이외의 업무, 즉 필요 이상의 회의, 프로젝트 관리, 팀 관리 등과 같은 일이 상대적으로 적거나 거의 없는 업무 환경이 주어진다. 이런 환경 속에서 시간이 흐르면 IC들은 자기 분야의 이른바 ‘고수’가 되게 마련이다. 만약 회사에서 백발의 할아버지가 코딩을 하고 있다면, 그는 분명 ‘코딩 만렙’인 IC 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IC 디자이너라면 디자인만 잘하면 된다. 그 외의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IC 디자이너로서 일정 부분 성장하다가 어느 단계에 오면 계속 IC로 성장할지, 아니면 매니저로 커리어를 성장시켜 나갈지 결정해야 할 때가 온다. 한국에서처럼 과장이나 부장을 달았다고 매니저 일을 시켜주지 않는다. 만약 본인이 팀이나 프로젝트를 관리하거나, 장단기 전략을 세우는 것에 비교적 관심이 적다면 계속 IC로 성장해갈 수 있다. 때문에 이곳에서 IC로 계속 커리어를 쌓는다는 건 관리자가 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진정한 전문가가 된다는 의미다.
두 번째 트랙: 문제 해결자들을 돕는 탁월한 서포터 ‘매니저’
현업에서 직접 디자인을 하기보다, 본인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멤버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일에 비전이 있고 디자인 전략가로서 성장하고 싶은 사람들은 매니저로서 커리어 트랙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적 의미의 팀장과 이곳의 매니저는 조금 다르다. 매니저가 된다고 해서 팀의 모든 IC들과 수직적 상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 레벨 이상의 IC들에게 매니저란 단지 맡은 업무가 다른, 수평적 의미의 동료에 가깝다. IC는 여전히 자신의 분야에 집중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매니저는 지시가 아닌 피드백과 매니지먼트에 집중하는 식이다.
매니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팀원(IC)들이 각각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일에 대한 명확한 목표와 기대치를 공유하는 것, 일을 하면서 수반되는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것, 이해관계를 명확하게 정리해 주는 것, 의사 결정 시 조언을 주고, 전략과 비전을 수립해 IC들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이 매니저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팀의 상황이나 매니저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 디자인 업무를 직접 하는 매니저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업무 시간은 회의 참석, 팀과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에 할애하게 된다.
내가 리딩 하는 팀의 디자이너들에게 가끔 “시스템으로 치면 나는 백엔드(Back-end)고, 너희는 프런트엔드(Front-end)다”라고 말할 때가 있다. 매니저 없이도 팀이 잘 굴러가게 만드는 매니저가 최고의 매니저라는 의미다. 즉 매니저는 본인 스스로 드러나기보다, 팀원들이 빛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실리콘밸리 커리어 사다리, 위아래뿐 아닌 양옆으로도 존재해야
실리콘밸리 커리어 사다리는 위아래, 양옆으로 자유롭게 존재한다. 한 예로 나와 함께 일하는 옆 팀의 한 매니저는 IC에서 매니저로, 매니저에서 다시 IC로, 다시 IC에서 매니저로 직무를 옮겼다. 이처럼 언제든 본인의 선택에 따라 커리어 패스를 바꿀 수 있는 시스템과 문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 역시 처음 매니저 제안을 디렉터에게 받았을 때 한참 망설였지만 결국 도전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매니저 일을 하다가 적성에 안 맞거나 성취감이 떨어지면 다시 IC로 옮기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전해 듣기로는 한국에서도 점점 직급 체계 및 조직 구성에 대한 변화와 새로운 시도가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일괄적 직급과 권한 위임의 체계에서 개인의 적성에 따라 커리어 트랙을 선택하는 실리콘밸리 모델이 좋은 옵션이 될 수도 있겠다. 매니저를 단지 ‘진급’의 개념으로만 봤던 과거의 관점과 달리, IC와 매니저의 두 가지 옵션을 다양한 방법으로 탐색하는 것은 개인의 커리어를 성장시키고 일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세환 / Design Manager, Lead
현재 실리콘밸리에 있는 eBay에서 Payment Design Team의 Design Manager 및 Lead를 겸하고 있다. 이 전에는 SAP, 삼성전자에서 근무했으며, B2B 및 B2C, 그리고 design system, eCommerce, payment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디자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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