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하면서 종종 실수하는 것이 있다. 바로 시간은 내 편이라는 착각. 나에게 시간이 주어지면 대부분의 일들은 무난하게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논리를 나에게만 적용하고 다른 사람은 ‘해당사항 없음’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특히 내가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들도 똑같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예전에 내가 알던 그들이 아니게 되는 데도 말이다. 나의 시간만큼 너의 시간도 흐른다.
우리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이는 필연적이기도 하다. 내 삶을 내가 살아가는 것이기에 우리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정말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의 생각이나 삶에 대해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후배 K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반년 전에 통화했을 때 직장 상사 때문에 퇴사 고민을 털어놨던 그였기에 소식이 궁금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의외였다. 우연한 기회에 상사와 두 시간 정도 진지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고, 이를 통해 밉게만 보였던 상사가 꽤나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는 걸 발견했다. K에게 퇴사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지점에 대해서도 많이 고쳐가고 있단다. 그러면서 K는 지난 6개월이 오히려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시계를 6개월 전으로 돌려보자. K의 말대로 상사는 후배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데 있어서 소위 꼰대 기질이 있었다. K 뿐만 아니라 K의 동기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평판을 들었다. 이런 내용들이 경영진의 귀에 까지 들어갔고 상사 역시 알게 되었다. K 스스로는 본인의 위치에서 바꿔 볼 수 있는 노력을 했다. 조직 변경을 통해서 보다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나갈 때 나가더라도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상사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 본인이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해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6개월의 시간은 K에게만 주어지지 않았다. 상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다. 그리고 상사는 달라지려고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내가 K의 상사의 노력을 높게 사는 것은 그 정도 경력을 쌓은 뒤로는 본인의 캐릭터를 바꾸려고 노력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는 K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결국 K는 상사와의 긴 대화를 통해 그동안의 앙금이라면 앙금이라 할 수 있는 무거운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한다
같은 맥락에서 시간에 관해 가장 조심해야 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주니어들이다. 이제는 시니어 소리를 듣는 나의 하루와 주니어의 하루는 다르다. 안타깝지만 인정해야 한다. 나 역시 주니어 때를 떠올려보면 성장에 목이 말랐다. 정체되어 있는 느낌을 꽤나 싫어했고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경험하고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많이 경험하고 많이 성장했다. 커리어에서 가장 많이 성장했던 적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리면 대략 10년 전쯤이었다.
주니어 시절 회사와 시니어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나 스스로는 나의 비판이 건설적이고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뒤돌아보면 참으로 당돌한 주니어였지만 그래도 이런 나를 팀장님을 비롯한 선배들은 잘 감당해줬고 덕분에 주눅 들지 않고 마음껏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랬던 나였는데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제는 시니어 입장에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있다. 주니어들의 성장 가능성에 대해서 기대하기보다는 현재의 어리숙함에 대해 채근하거나 부족함에 대해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 차 버리기도 한다.
팀장으로 있을 때 팀원 M이 있었다. 확실한 건 또래 직원들보다 똑똑하고 많은 경험을 쌓은 주니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그에게 기대하는 수준 역시 평균 이상이었다. 권한 위임(empowerment)도 충분히 해줘서 일을 맡기면 별도로 중간에 체크를 하지 않고 어느 정도 완성하기 전까지는 마음껏 일을 할 수 있게 해 줬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하나를 알면 열을 알길 바랐던 나의 마음과 달리 성장 속도는 더뎌보였다. 그래서 새로운 업무를 계속해서 맡기면서 경험을 쌓게 해 주기보다는 현재하고 있는 일들을 관리하는 것에 집중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조치는 그의 성장 기회를 제한했다.
그러다 M이 조직 변경으로 다른 팀으로 가게 됐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기회를 충분히 부여받았다. 처음엔 M이 본인 능력으로는 버거워 보이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기대에 200% 부응하는 결과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내가 실수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M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간과한 것은 그의 잠재력, 성장 속도였다. 내가 그의 나이였을 때 얼마나 성장에 목말랐고 또 실제로 그 어느 때보다 성장했는지는 까맣게 잊었다. 그에게 일정 시간이 주어졌을 때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 지를 잊은 탓에 뛰어난 팀원과 함께 신나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이러한 상황은 꼭 뛰어난 주니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직장 생활에서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인간관계다. 누구나 한 명쯤은 자신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 이런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대체 저 인간은 언제쯤 변할까?’ 하지만 나에게 시간이 주어진 만큼, 그에게도 정확히 똑같은 시간이 주어진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부분은 자신이 아무리 잘났어도 평균보다 겨우 조금 더 나은 사람 정도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욕하는 그 사람도 내가 생각하는 만큼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과 그 사람을 포함한 대부분은 주어진 시간 속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고자 노력한다.
슬로우 슬로우 퀵 퀵
나를 돌아봐도 내가 365일 24시간 성장했던 것은 아니다. 성장하기에 알맞은 기회가 찾아왔고, 종종 나의 성장을 적극 도와주는 상사를 만났고, 또 이따금씩 환상의 팀워크를 발휘할 수 있는 팀원들을 만났다. 춤 박자인 슬로우 슬로우 퀵 퀵처럼 일정 기간 성장이 멈춘 듯한 시기가 왔다가도 다시금 폭풍 성장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난 성장했다.
물론 나의 성장이 항상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 기대 이상으로 성장해 뿌듯하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실망할 정도로 성장은커녕 주위에 피해를 끼친 적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주일, 한 달이 아닌 1년, 5년을 두고 봤을 땐 나는 분명 성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사람을 기다려줄 줄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보다는 나 자신이 그러했듯이 상대방도 시간을 두고 결국은 성장 그래프를 그릴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선택일 것이다.
스타트업의 시간은 조금 빠르게 흐른다
어쩌다 보니 2019년부터 계속해서 스타트업에 몸을 담고 있다. 스타트업은 본질적으로 성장에 목마른 사람들로 가득하다. 스타트업에서의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이곳에선 시간이 조금 더 빠르게 흐른다. 남들과 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지지만 그 안에 성장해야 하는 기대치가 다르다. 성장이라는 큰 흐름에 본인을 내맡기기도 한다. 스타트업에서는 각자의 책임과 역할이 칼로 자른 듯이 명확하지 않다. 본인의 주종목도 잘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종목도 어지간히 해야 한다. 나 역시 현재 회사에서 사업 개발과 투자를 담당하지만 그동안의 커리어를 통해 경험을 쌓은 마케팅, 언론홍보, 컨설팅 프로젝트에도 관여한다. 대기업에선 다른 팀 프로젝트 미팅에 참석은커녕 몇 마디만 거들어도 오지랖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스타트업에선 과장을 조금 보태면 회사 프로젝트 절반 이상에 발을 담그고 산다. 그래서 성장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동일하게 나의 시간만큼 상대방의 시간도 흐른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다들 성장에 목을 매다 보면 주춤하는 멤버들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기보다 수군거리기가 쉽다. 하지만 규모가 적은 스타트업에선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회사를 떠나는 이들이 결국엔 생겨난다. 스타트업이라고 해서 모두가 스타트업 경험이 있지는 않다. 누구는 대기업에서, 컨설팅 회사에서, 또는 첫 직장으로 스타트업에 입사한다. 때문에 처음 한 두 달간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생겨난다. 나 역시 외국계 기업을 다니다 처음으로 스타트업에 갔을 때 받았던 문화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 스타트업에선 첫 석 달 간은 직원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기다려주는 프로세스가 자리 잡길 바란다. 물론 창업 초기인 스타트업의 경우 석 달은 너무 길기에 한 달이라도 시간을 주었으면 한다. 실제로 많은 스타트업들이 이런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일반 대기업에서는 수습기간(Probation Period)을 형식적으로 운영하는 데 반해 스타트업에서는 신규 입사자가 스타트업의 전반적인 문화에 적응하며 업무를 수행하도록 이 기간을 활용한다. 그러다 보니 수습기간이 지나고 회사가 직원을 정식 채용하지 않기도 하고 직원이 회사를 자발적으로 떠나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한다. 서로가 일당백을 기대하는 스타트업의 치열함 속에서도 나의 시간만큼 상대방의 시간도 흘러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함께 성장의 기쁨을 누리길 바란다.
자신에 대한 관심의 십 분의 일만이라도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것은 당연하지만 자신에 대한 관심의 십 분의 일만이라도 주위 사람들에게 가져보면 어떨까. 가끔 카페에 앉아 거리에서 분주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면 문득 이런 생각들이 든다. ‘다들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걸까?’ ‘무엇을 하길래 저렇게 부지런히 다닐까?’
나에겐 내가 세상의 전부 같지만, 세상에게 나란 존재는 정말 작디작은 존재다. 그러기에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내가 오늘도 어김없이 누리는 스물네 시간이라는 시간 앞에서 겸손할 필요가 있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돌아가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충분히 주위를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간에 대해 어떻게 관심을 갖느냐’이다. 가장 좋은 것은 ‘대화’이다. 일대일로 하는 대화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K 역시 대화를 통해 오해가 쌓인 상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이 현재 어떤 일을 주로 하고 있고 어떤 부분이 고민이고 어떻게 자기계발하고 있는지 대략 알 수 있다. K처럼 상사가 자신을 피곤하게 했던 지점에 대해서 간접적으로라도 대화를 통해 풀 수도 있다. 요즘은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많은 조직에서 프로젝트 단위로 업무를 진행하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과 얽혀 가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을 하는 시간이 느는 만큼 갈등이 생길 가능성도 높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상대방 역시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서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내가 성장을 원하는 것처럼 그 역시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고 생각해보자.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없던 힘도 생겨 함께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시간만큼 너의 시간도 흐른다’는 생각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큰 변화를 불러올 거라 생각한다. 사람을 보는 시각부터 달라지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가능해지는 경험도 기대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에게 정말 도움 될 수 있는 사람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그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동감 있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들을 쉽게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Mark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