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을 떠난 예술가, 붓을 내려놓고 창업을 하다.
미술관을 떠나는 아티스트
차가운 콘크리트로 메워진 기하학적 전시관 건물 안에 사회의 다양한 이면을 시각화한 작품들이 가득하다. 명품으로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휘감은 방문객들 사이에서 유독 간결하고 절제된 색상의 복장을 한 젊은 여성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바로 이 전시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자신의 작품으로 채운 아티스트였다.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그토록 오랜 기간 갈망했던 개인전을 열었지만, 가슴 한편이 공허하고 답답했다.
그녀의 작품들은 사회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그녀의 작품이 전시된 공간과 이 공간을 누비는 사람들은 그런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 같았다. 자신이 본 사회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위축된 심리를 위로하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이 무의미해 보였다. 마음이 무거웠던 전시회 일정이 끝나고 작품들과 짐을 정리하는데 상당히 많은 폐기물이 나왔다. 사전에 이러한 폐기물들을 최소화할 목적으로 비디오를 활용한 미디어 아트 형식을 채택한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내가 하고자 했던 것은 예술인데 그 부산물로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게 과연 맞는 걸까?’ |
그녀는 고민 끝에 미술계를 나와 세상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이 20대 중반의 여성이 나중에 공공공간을 창업한 신윤예 대표였다.
창신동 봉제골목에서 마주한 기회
붓을 내려놓은 그녀는 자신이 예술 말고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컸다. 예술을 완전히 놓고 싶지 않았지만,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자신이 직접 해결하고 싶은 욕구도 컸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화그룹에서 사회공헌 사업으로 운영하는 ‘한화 예술 더하기’를 알게 되었다. 당시 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에게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미술을 하면서 사회에도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무척 들었다. 그렇게 그녀가 처음으로 파견을 나갔던 곳이 창신동에 있는 해송지역아동센터였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아동·청소년과 함께 30여 년을 생활해 온 생활교육공동체였다.
태어나서 아파트에서만 살아 아파트 키즈였던 그녀는 창신동이라는 지역만이 가진 독특한 구조와 에너지 가득한 분위기가 무척 신선했다. 이곳은 드라마 속 본격적인 신분 상승의 차선에 들어서기 전 가난한 여주인공의 주거지로 자주 등장했는데 사실 허름한 주택만큼이나 많은 게 바로 봉제가게이다. 작고 수많은 봉제가게가 서로 온기를 나누려는 듯 따닥따닥 붙어 있는 풍경 자체가 생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대학을 막 졸업한 젊은 예술가들은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서 종종 작은 공간을 빌려 둘이서 혹은 셋이서 작업실로 공유하는데 왠지 그 광경이 자신의 모습 같았다.
그녀가 미술을 가르쳤던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대부분 창신동 지역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분들이었다. 가내수공업을 하는 작은 봉제가게가 골목 양편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봉제골목’라는 이름이 생길 만했다. 창신동 봉제골목은 1970~80년대 동대문 의류시장이 번성하면서 자연스레 생겨났다. 창신동은 외지인은 길을 잃을 정도로 깊고 언덕진 골목이 많은데 가장 높은 곳은 웬만한 아파트나 고층건물의 최상층을 내려다볼 정도이다.
수업을 위해 지역아동센터가 위치한 언덕을 오르는 길에 신윤예 대표는 큰 100ℓ 종량제 봉투가 골목길 양쪽으로 수두룩한 것을 발견하였다. 호기심에 안을 봤더니 모두 봉제가게에서 옷을 만들고 버린 자투리 원단이었다. 봉제 공장이 밀집한 창신동에서 실제 버려지는 자투리 천의 양은 연간 8000톤에 이른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쓰레기구나 하고 지나칠 풍경이지만 신윤예 대표는 이 생소한 모습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녀는 아직 쓸 수 있는 원단이 이렇게 많이 버려지는 게 너무 아까워서 버려진 자투리 천을 아이들과 함께하는 미술 수업의 재료로 활용하고자 그 큰 봉투를 이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언덕에 오르던 중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쉴 겸 원단이 든 봉투 위에 앉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편했다.
‘어쩌면 이렇게 버려지는 원단을 재활용하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지 않을까?’ |
첫 번째 프로젝트: 제로웨이스트 디자인
신윤예 대표는 원단이 든 종량제 봉투의 쿠션감이 예상 외로 좋아 아예 상품화를 해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창신동의 봉제가게들을 돌며 자투리 원단을 확보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했고 그렇게 수거한 자투리 원단으로 본격적으로 쿠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투리 원단의 업사이클링이었다.
초기 반응은 무척 긍정적이었다. 특히 취지에 공감한 대기업들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한 번에 작게는 수십 개부터 많게는 수백 개씩 주문을 해주셨다. 신윤예 대표는 버려진 원단을 재활용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애초에 버려지는 원단을 줄이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첫 번째 프로젝트였던 자투리 원단 쿠션으로 인해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윤예 대표는 애초에 상품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자투리 원단을 최소화하는 제로웨이스트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로 했다. 이전에는 단발성 프로젝트였다면 실제로 의상을 전공한 지인을 디자이너로 영입을 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적인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을 구현한다는 것은 의외로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외부의 도움 없이 만든 첫 상품을 보고 신윤예 대표와 동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우와 이거 시대를 너무 앞서갔는데. 이대로라면 런웨이 무대 위에서나 가능할 것 같아. 평소에 입으려면 엄청난 자존감의 소유자가 아니면 어려울 것 같아.”
그 뒤 신윤예 대표와 동료들은 전국의 유명한 전문 재단사나 패턴 제작자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다.
“선생님, 저희가 자투리 원단을 최대한 나오지 않도록 옷을 디자인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너희가 뭘 안다고 옷 만드는 방식을 바꿔. 이게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방식이었을 것 같아? 지난 몇십 년 아니 몇백 년 동안 최적화된 것이 지금이 방식인 거야.”
그런데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전문가들 옆에 붙어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고 집요하게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장인들의 도움을 받아 원단을 최대한 직선으로 퍼즐을 맞추듯 재단하여 버려지는 자투리 원단을 최소화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낮과 밤의 구분이 없고 출근과 퇴근의 경계가 무너진 6개월이라는 시간을 제품 개발에 쏟았다. 마침내 셔츠부터 바지 그리고 다양한 소품들로 제품을 차례대로 출시하였다.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의 취지에 공감하는 많은 분들이 구매를 해주셨다. 의외로 가장 반응이 높았던 것은 작업용 앞치마였다. 봉제가게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주류 브랜드의 로고가 들어간 앞치마를 이용하는 것을 보고 그분들을 위한 작업용 앞치마가 꼭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기획하게 되었다. 제품을 출시 후 매체와 기업들이 관심을 많이 보내고 조금씩 제로웨이스트 상품들이 알려지자 동료들과 주위 분들은 이제 공공공간이 비상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017년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 까르띠에가 주최하는 ‘여상 창업 어워드’에서 아시아 대표로 최종 선발이 되자 주위 분들과 구성원들의 기대는 더욱 높아졌다. 싱가포르에서 일주일 동안 진행된 어워드 행사에 참여하였는데 까르띠에 그룹 회장과 만나고 각 대륙에서 선발된 다른 창업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수상 혜택보다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세계적인 컨설팅펌의 전문 컨설턴트와 나눈 대화였다.
“너가 이 사업을 통해서 해결하고 싶은 문제는 나 역시도 공감해. 그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너의 도전정신도 존중하고. 그런데 정작 이게 전반적인 패션 산업 내 플레이어들이 모두 따라 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생산적인지 고민을 해봐. 패션 브랜드들이 기존의 제작 방식을 고집한다면 나름 이유가 있지 않을까?”
지속이 불가능했던 지속가능한 디자인
신윤예 대표는 컨설턴트와 미팅 후 사업의 성장성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을 적용한 제품들을 선보이면 처음에는 많은 분들이 호응하고 구매로 이어지는데 그 팬층이 쉽게 확장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품을 다양한 사이즈로 기획하고 제작하는 것이 어려웠다.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을 적용하려면 사이즈 별로 각각 기획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제품 출시를 위한 준비 기간은 늘어나고 인건비를 포함한 원가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소비자로서는 자투리 원단을 최소화했으면 그만큼 가격이 더 저렴하거나 비슷해야 하는데 일반상품 대비 더 높은 가격이 논리적인 설득을 필요로 했다. 무엇보다 옷은 개인의 취향이 상당 부분 반영되는데 자투리 원단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제작한 옷은 개인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는 데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매년 계절에 맞추어 신상품들을 미리 생산하는 것은 악성 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과 같다.
착한 기업의 제품을 한두 번 살 수는 있지만, 유지 가능한 사업이 되려면 구매자가 정말 그 제품에 높은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환경 문제를 거듭 언급하며 판촉을 하는 것은 어쩌면 고객에게 당위성을 주장하며 지갑을 열라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신윤예 대표는 취지를 공감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런 의도로 이어진 구매는 결국 또 다른 폐기물을 생성한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였다.
동료들이 떠난 사무실에 홀로 남은 창업가
오랜 고민 끝에 신윤예 대표는 사업모델을 전격 변경하기로 하였다. 이제는 패션 디자인 기업이 아닌 IT기반의 스타트업으로 말이다. 그녀는 선주문 맞춤 제작 플랫폼으로 변경하는 것을 구성원들과 논의했다. 그러자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옆에서 같이 제로웨이스트 의류 상품들을 기획하고 디자인을 해온 동료들은 혼란스러웠다.
“대표님, 저는 제로웨이스트의 취지에 공감하여 그러한 의상을 디자인하기 위해 합류했어요. 저는 IT기업에서 근무하는 것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우려하시는 부분 충분히 이해해요. 그런데 아시겠지만 저희가 기존의 사업 모델로는 한계가 명확해요. 재구매율은 점점 낮아지고 신상품은 업계 평균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요구하는 반면 단가도 높아요.”
설득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은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가기 위해 퇴사를 결심하였다. 그리고 높은 생존의 벽에 부딪힌 신윤예 대표는 이후 며칠을 고민한 뒤 남은 직원들과도 대화를 나눴다.
“이제는 플랫폼을 운영하는 IT기업으로 변모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고 성공의 가능성도 적어요. 그래서 현재 회사 사정상 여기 계신 분들의 안정적인 커리어와 급여를 약속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
신윤예 대표는 자신의 결정으로 인한 여파는 온전히 본인이 지고 가겠다는 심정으로 남아있던 직원들도 모두 내보냈다. 그렇게 모두 떠난 텅 빈 사무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신윤예 대표는 절망적인 현실에 자포자기하고 싶었다. 그녀는 3개월이 넘도록 수면유도제 없이 잠이 들지 못하는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회사의 사외이사인 카이스트의 장대철 교수를 찾아가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교수님, 동료들이 모두 퇴사했어요.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에 겁 없이 덤볐다가 결국 이렇게 돼버렸어요. 제가 너무 고집을 부린 걸까요? 디자인 회사로는 성장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데 제가 결정을 잘못 내린 걸까요?”
“신대표,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망해도 좋으니 후회 없이 끝까지 해봐.”
신윤예 대표는 더는 방황할 수 없어 마음을 더 굳게 먹고 해볼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해보기로 하였다. 우선 팀원들이 모두 퇴사를 하여 혼자인 만큼 창신동에 큰 작업공간은 이제 필요가 없어져 정리하였다. 그러던 중 창업 이후 매출 부진과 자금 부족 등으로 위기를 맞은 3~7년 차의 창업기업을 위한 지원사업인 창업도약패키지를 알게 되었다. 신윤예 대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지원사업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사업계획서를 다시 쓰며 그녀의 지난 8년의 경험과 고민을 담은 플랫폼을 구체화하기로 했다.
10년이라는 세월과 경험이 응축된 플랫폼, ‘위드굿즈’
사업계획서를 다시 쓰던 중 신윤예 대표는 대학 졸업 후 자신의 신인 예술가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 인지도가 없는 주위의 동료 신인 예술가들이 생활비라도 벌어보겠다고 그나마 진입장벽이 낮은 굿즈 시장에 도전했다가 뼈아픈 실패를 겪었다. 제작과정도 험난하고 길었지만, 막상 제작한 굿즈가 생각만큼 팔리지 않자 모든 재고를 떠안으며 사업의 높은 벽을 체감하였다. 신윤예 대표는 예술가들이 본인의 그림으로 개인 굿즈 브랜드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여기에 제조업 소상공인들의 물건을 활용한다면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제로웨이스트로 제작을 해도 재고는 생기기 마련이고 팔리지 않는 모든 재고는 결국 폐기물이나 다름없다. 또한, 재고로 인해 고생했던 만큼 이 플랫폼에서만큼은 단 한 개의 제품도 맞춤으로 제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굿즈 제작에 쓰일 재료를 미리 갖춰두고, 소비자들의 주문이 들어오면 생산하는 ‘온-디맨드’방식으로 운영한다면 재고와 폐기물을 최소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에 단 하나만 있는 굿즈, 나만을 위한 위해 제작된 전용 굿즈가 주는 가치는 돈으로 쉽게 환산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신윤예 대표는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을 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과거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창작자, 인디 디자이너들과 협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공공공간 역시 수익을 추구해야 하는 기업인지라 협업의 화제성과 예상되는 매출 규모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의 주요 협업 파트너는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CSV(공유가치창출)라는 숙제를 풀어야 하는 대기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스몰 스케일이 모이면 빅 스케일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재고에 대한 부담 없이 창작자와 제작자들이 자유롭게 희소성 있는 굿즈를 기획하고 생산하는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을 사업계획서에 담았다. 창업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깊은 고민의 흔적이 묻어난 사업계획서는 창업도약패키지에 선정되었고 그녀는 신사업에 대한 자신감과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신윤예 대표는 자신이 제시하는 비전에 공감하는 동료들을 영입하며 서비스를 구현하고 개발하는 데 힘썼다. 덕분에 2019년 ‘위드굿즈’라는 굿즈 맞춤제작 플랫폼의 베타 테스트를 시작할 수 있었고 2020년에는 공식 론칭하였다. 회사를 설립한 후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사업모델을 변경하고 동료들이 떠나고 혼자 남는 일도 있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모든 경험과 이상향을 쏟아낸 ‘위드굿즈’라는 서비스를 선보일 수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내 마지막 도전이 될 수 있어. 내 모든 걸 쏟아붓고 후회 없이 달려보자.’ |
위드굿즈를 통해 기대하는 변화
최근 미술시장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관심을 받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21년은 한국 미술계의 역사적인 해였다. 예술경영지원센터에 따르면 2021년 국내 미술시장 거래 규모는 9223억원으로 전년 대비 3배 가까이 성장했다. 대체불가토큰(NFT) 제작이 돌풍을 일으키며 미술의 디지털 세계 진출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소수 유명 작가와 대형 경매사 및 화랑이 성장의 과실을 독차지했다. 2021년 미술품 낙찰액의 55.8%가 상위 10개 작품에서 발생했다. 최근 MZ세대가 미술 투자에 뛰어들며 저가 작품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고 하지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작가와 신인작가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2011년 1월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계기로 예술인의 열악한 창작 및 생활여건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예술인에 대한 정책적 지원 필요성이 표면화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공개한 ‘2021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미술업계 종사자의 연간 수입은 487만원으로 2018년 조사 때보다 오히려 382만원이 줄었다. 소수가 수익 대부분을 가져가는 건 세계 미술계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하지만 한국은 유독 문제가 심각하다. 2020년 미국 노동통계국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 작가 연평균 수입은 6만 5020 달러(약 7775만 원)으로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국내 대기업 연평균 임금인 약 6348만원보다 높다. 예술인에 대한 복지가 비교적 잘 되어있는 유럽의 경우, 작가들이 1인당 GDP(국내총생산) 평균에 준하는 수입을 벌어 들인다.
플랫폼 위드굿즈의 핵심은 청년 작가들의 경제적 자립이다. 작가들은 굿즈 판매가의 30%를 갖는다. 제작 원가와 유통비를 제외한 순이익이다. 예를 들어, 판매가 3만5000원짜리 텀블러 하나를 팔면 1만500원을 받는 셈이다. 공공공간이 제품 생산부터 배송까지 모든 과정을 도맡아 진행하기 때문에 디자인 시안을 넘긴 작가는 추가적인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현재 위드굿즈에 등록된 작가는 약 6000명에 육박한다. 이들이 내놓은 굿즈만 6만3000여 종에 이른다.
신윤예 대표는 이 시대의 디자이너와 창작자라면 사회적인 책임감을 갖고 생산 과정까지 고려해서 디자인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적 디자인의 제품일지라도 디자인과 가격 면에서 다른 기성 제품과 비교해봤을 때 경쟁력이 있어야 말한다. 위드굿즈의 제품이 단순히 선한 취지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닌 ‘필요하고 적절한 가격의 제품이어서 선택했는데 알고 보니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구나’라는 반응을 얻을 수 있길 바란다.
영국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은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를 평생의 덕목으로 삼았다.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얘기다.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마음 사이 어디쯤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까 고민하게 만든다. 신윤예 대표는 지난 10년간 지역사회와 환경을 위한 사업을 하면서 공공공간만의 경영이념이 명확해졌다. 서비스나 제품이 고객의 감정에 호소하면 일시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으나 고객의 취향과 필요를 만족시키면 그 관계는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는 것이다. 위드굿즈가 고객의 일회적인 소비를 끌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신뢰하고 애착이 가는 서비스로 성장하여 소비에 대한 우리의 좁은 시각을 변화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해당 콘텐츠는 Jimmy Cho님과 모비인사이드의 파트너쉽으로 제공되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