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8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이곳 실리콘밸리로 건너온 지 벌써 5년 정도다. 미국으로 건너와 느꼈던 양국의 일하는 방식 차이를 본지를 통해 나누고자 한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거나 한 번쯤 생각해본 한국의 직장인들이 미국 직장 생활의 현실을 구체화하는 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미리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한국이나 미국 어느 한쪽의 기업문화 중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목적과 상황, 성향에 따라 자신과 맞는 문화와 환경이 다르다. 이곳에서 나누는 내용은 나 개인의 취향일 뿐임을 독자들께서 알아주셨으면 한다.
근태 시스템 없는 실리콘밸리?
내가 한국에서 일할 때는 출근과 퇴근을 관리하는 방식을 두고 ‘근태 제도’라고 불렀다. 당시 내가 일했던 S사는 ‘8 to 5제’(8시에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하는 제도) 혹은 ‘9 to 6제’(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는 개성과 창조성이 중요한 디자이너 조직 특성을 고려해 우리 조직에 한해 유연 근무제를 시범적으로 도입했다. 오후 12시 전에만 출근한다면 출근한 시각부터 총 8시간을 근무하면 되는 제도로, 주류 언론사에 여러 번 기사화 될 정도로 당시에 획기적인 제도로 평가 받았다.
그러다 미국에 건너와 보니 출퇴근 관리 시스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몇 시에 와서 몇 시에 가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미국은 회사나 직종에 따라 근무 환경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이곳 이외의 기업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실리콘밸리는 그렇다. 때문에 사람들은 본인이 업무량에 따라 출퇴근 시간을 스스로 결정한다. 일이 많은 경우에는 아침 일찍 나와서 일을 하기도 하고, 반대로 일이 없을 때는 점심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아침 7시 혹은 8시에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아무리 늦어도 5시 이후에 남아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 문화
칼같은 근태 시스템도 없고, 알아서 왔다가 적당히 퇴근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의 업무 강도는 어떨까. 앞서 말한 ‘無 근태’ 시스템에 대해 소개하면, 사람들은 흔히 실리콘밸리의 업무 강도가 한국보다 낮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업무 성과를 평가하는 방식이 한국과 다를 뿐이다.
한국에서는 출근한 후에도 업무 외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이 은근히 많았다. 예정에 없던 회의가 잡힐 때도 있었고, 동료와 커피 한잔을 하거나 소위 ‘담배 타임’도 빠질 수 없었다. 절대적인 업무량은 정해져 있는데 업무 외적으로 시간을 사용하다 보니 거의 매일 야근을 했었다. 반면 늦게까지 함께 일하고 고생하다 보니 동료들과의 관계가 끈끈해지고, 사람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한편 이곳에서는 일주일에 하루도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지 않는다. 점심을 먹거나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100% 일하는 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사무실 내 자리에 앉으면 좀처럼 일어날 일이 없다. 사전에 나에게 공지된 것이 아니라면 갑자기 생기는 회의도 거의 없다. 아침 및 점심 식사 뿐만 아니라 커피와 간식류도 회사 곳곳에 비치되어 있다. 미디어에 소개되는 실리콘밸리의 좋은 복지와 근무 환경은 결국 직원들의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필요한 건 여기 다 있으니, 여기서 해결하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일하라’는 의미 같다. 정해진 업무를 끝내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매니저와 함께 업무량을 조절하거나, 추가 인력을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떻게든 야근을 해서 혼자서 업무를 끝내려고 무리해서 끙끙대지 않는다.
가끔 이마저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야근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 노트북을 사용하므로 회사에 남아서 하기보다 집에 노트북을 가져와서 한다. 회사에 남아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기특하게 늦게까지 남아 열심히 일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 친구는 일이 많나’, ‘팀에 사람이 모자라나’, 아니면 ‘오늘 늦게 출근했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또 저녁 식사 시간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내는 사적인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곳 문화의 영향도 있겠다.
직급과 함께 많아지는 업무량
하지만 이곳에서도 직급이 올라가면 한국 회사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야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매니저 이상의 직급이 될수록 중요한 의사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이슈가 있을 경우 서로 다른 입장의 매니저 두세 명이 논쟁에 가까운 회의를 거쳐 의견을 좁혀나가고, 이 과정은 보통 지난하게 이어진다. 즉 매니저들은 업무 시간에는 회의를 하느라 본인의 업무를 할 시간이 없어, 늦은 저녁 시간이나 주말까지 일을 하는 경우가 꽤 많다.
또 가족, 친구들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문화가 강하다 보니 회사 동료들과의 관계가 피상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나처럼 외국인으로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싱글의 경우 퇴근 후나 주말에 할 일이 없어서 외로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외로움이 무슨 대수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겪어봐야 그 힘든 기분을 알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나 뉴욕에 Meetup(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하고 네트워킹 하는 것으로, 한국의 ‘정모’와 비슷하다) 같은 이벤트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인 것 같다. 젊은 친구들이 실리콘밸리 지역의 회사에서 일을 하더라도 즐길거리가 많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회사? 집? … 핵심은 근무 장소가 아닌 업무 생산성
재택근무도 근태 제도와 마찬가지다. 이곳 회사는 재택근무 사전 승인 시스템이 없다. 그냥 ‘나 오늘 집에서 일할 거야’라는 이메일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 이메일 제목은 그마저도 성의 없는 ‘1) WFH(Working From Home)’이다. 그래도 이메일을 보내주기라도 하면 성의가 있는 편이다. 아무런 고지 없이 재택 근무를 하는 동료들도 많이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자유로워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여태껏 누군가 자리에 없어서 업무가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필요한 회의가 미리 공지되어 있는데도 재택근무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집에서 ‘진짜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팀원 간의 커뮤니케이션에도 문제가 없다. 문제는 어디에서 일을 하는지가 아니라, 업무 생산성이 떨어지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1) 지금 현재 이곳 대부분의 회사가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우리 회사, 우리 팀의 경우에도 2020년 3월 이후 지금까지 100% 재택근무 중이며, 팀원에게도 앞으로 별다른 공지가 없는 한 계속 재택근무를 하라고 한 상황이다. 그리고 재택근무가 일상화된 요즘에는 WFH라는 단어보다는 Remote work이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성과 평가 기준은 개인 단위로
한국이나 실리콘밸리나 모든 회사는 성과를 위해 달린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두 나라의 성과주의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내가 근무했던 회사는 ‘팀’ 중심의 성과주의다. 예를 들어 한국의 어느 팀이 A 프로젝트는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B 프로젝트는 성공을 거둔 상황을 상상해보자. 팀장은 실패한 A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성공한 B 프로젝트의 성과도 팀장의 실적이 된다. 실패한 A 프로젝트의 팀원들은 실패의 책임에서는 팀장보다 비교적 자유롭다. 하지만 성공한 B 프로젝트의 팀원들은 스포트라이트를 직접적으로 받기가 어렵다. (물론 실패는 팀원에게, 성공은 본인에게 돌리는 최악의 팀장도 있었지만 말이다.)
반면 실리콘밸리는 ‘개인’을 중심으로 한 성과주의다. 위의 같은 상황이 이곳에서 벌어진다면 A 프로젝트를 진행한 팀원인 PL(Project Lead)이 책임을 지고, B 프로젝트를 진행한 팀원인 PL은 좋은 평가를 받는다. 팀원 본인이 성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는 팀원 각자가 열정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게 하는 동시에 업무 부담으로 다가온다. 팀 매니저는 프로젝트를 직접 진행하기보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PL의 업무를 조율하는 업무를 하게 된다. 그에게는 프로젝트 자체의 성과 보다는 좋은 PL들을 여럿 키워내는 것이 큰 성과가 된다.
본 편에서는 근태, 재택근무 및 성과를 평가하는 방식을 비교해보았다. 한정된 경험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내용이지만, 실리콘밸리의 업무 환경 문화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한다. 다음 편에서는 그 외 다른 회사의 여러가지 정책, 문화, 프로세스와 관련한 내용들을 소개해볼 예정이다.
박세환 / Design Manager, Lead
현재 실리콘밸리에 있는 eBay에서 Payment Design Team의 Design Manager 및 Lead를 겸하고 있다. 이 전에는 SAP, 삼성전자에서 근무했으며, B2B 및 B2C, 그리고 design system, eCommerce, payment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디자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브리핑스와 모비인사이드의 파트너십으로 제공되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