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데는 수만 가지 이유가 있다지만 그중에 가장 씁쓸한 이유는 ‘지겨워서’가 아닐까? 직장 생활을 사랑에 비유하는 거 자체로 큰 실례가 되는 일이지만, 직장과 헤어지는 ‘이직’을 하는 가장 씁쓸한 이유 역시 ‘지겨워서’일 것이다.
사전에서 ‘지겹다’의 정의를 찾아보고 깜짝 놀랐다. ‘지겹다‘는 ‘넌더리가 날 정도로 지루하고 싫다‘는 뜻으로 생각보다 어감이 강했다. 즉, 지루하기도 싫기도 한데, 최상급으로 지루하고 싫은 것이 바로 지겹다는 뜻이다.
이유 없는 이직은 없다. 좋은 곳에서 좋은 제안을 받았다고 해서 무작정 옮기지 않는다.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을 떠나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이유에 좋은 제안이 더해져 이직을 확정한다.
이직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내가 경험한 사람들을 보면 현재 직장에서 더 이상 경력 개발이 어렵다거나 자신이 노력한 만큼 인정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외에도 심각한 인간 갈등을 겪거나 입사 때부터 일정 기간만 다니고 다른 곳으로 가려던 이들도 제법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들은 표면적인 것들이고, 한 겹 더 깊이 들춰보면 본질적인 이유가 등장한다.
“그거 말고 진짜 이직하는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돼요?”
“(…) 마크, 사실은 저 이제는 정말 지겨워서 못 참겠어요.”
내가 발견한 본질적인 이유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지겹다’는 이유이다. 대체 무엇이 얼마나 지겹길래 모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회사를 그만두려는 것일까?
변하지 않는 회사에 대한 지겨움
나는 회사에 불만이 없던 적이 있을까? 글쎄, 일시적으로 없던 때가 있었지만 거의 항상 조금씩의 불만은 갖고 있었다. 왜 그런지 몰라도 회사는 지독히도 변하지 않는다. 신입이었을 때나 임원이었을 때나 동일하게 느끼는 것은 회사를 변화시키는 일은 마치 에베레스트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이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한 번 더 회사를 믿어본다.
‘이번엔 다르겠지.’
2012년 5월의 어느 날, 나는 멘토였던 부장님과 회사 뒤편 커피전문점에 앉아 있었다.
“부장님, 이번 달 면접 본 외국계 회사에서 오퍼 레터를 받았어요. 제가 왜 이직하려는지는 그동안 여러 차례 얘기했었는데, 그래도 최종 결정하기 전에 부장님한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회사가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회사가 변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부장님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없어, 마크. 지금 회장님이 돌아가셔야 변할 거야. 그냥 이직해.”
부장님은 회사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테니 떠나라고 했다. 그리고 난 한 달 뒤 이직했다.
첫 회사는 가족 같은 회사였다. 직원들 사이에 비밀이 없었고 연차를 써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목적과 행선지를 알려야 했다. 12월이 되면 출근하는 날 20일 중에 15일은 이런저런 회식이 있었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국내 기업 문화였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건 성과 보상 시스템이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이다. 연차가 같은 직원이 100명이 있다면, 상위 10%와 하위 10%의 연봉 차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고생하는 부서에 가거나 회사에서 신경 쓰는 보직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야근하고 좋은 성과를 내더라도 돌아오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부서에서는 팀원들이 돌아가며 좋은 성과 평가를 받았다. 즉, 작년에 내 평가 점수가 A였다면, 올해는 아무리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어도 다른 팀원을 위해 A를 양보하고 B를 받아야 했다. 이런 문화가 오랜 기간 동안 바뀌지 않다 보니 톡톡 튀면서 열심히 하려는 직원들은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났다.
이직 후 몇 년이 흘러 회사를 찾아 멘토였던 부장님과 같이 저녁 식사를 했다. 나는 회사에 변화가 있는지 물었다. 부장님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크, 회장님이 어떻게 생각하는 줄 알아? 이렇게 좋은 회사에 왜 대학생들이 지원하지 않는지 정말 의아해 하셔. 회장님 빼고 다 아는 사실을 본인만 모르고 있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아무도 이런 현실에 대해서 회장님에게 직언하지 않는다는 거야.”
지금까지 첫 회사 동기들 중 90%가 이직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부분 더 좋은 회사에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했다는 것이다. 첫 회사가 변하지 않는 답답한 부분도 있었지만 업무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실력을 갖추기에는 좋은 환경이었다. 동기들끼리는 우스갯소리로 회사가 마치 ‘이직 사관학교’ 같다고 했다.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지만 실력은 키울 수 있어서 좋은 회사로 이직하게 해 준다고 해서 말이다.
반복적으로 실망을 주는 리더에 대한 지겨움
회사가 변하기 어렵다면 리더로부터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을까? 의외로 많은 직장인들이 회사와의 궁합보다 리더와의 궁합으로 인해 마음 고생한다. 즉 변하지 않는 회사가 지겨워도 좋은 리더를 만나면 보다 오래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다. 반면에, 좋은 회사여도 반복적으로 실망을 주는 리더를 만나는 경우가 오히려 더 이직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리더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마다 주위에서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나도 이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경험해보니 직장 생활하는 모두가 잘 변하지 않더라. 사장님은 물론이고 신입사원도 잘 변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위계질서가 있다 보니 팀원들은 팀장과 임원들의 말을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신입 때 감췄던 본모습들이 팀장이 되고 나서 드러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A 부장님 말이야. 팀장 되고 나더니 완전 사람이 달라졌더라.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을 간혹 듣는데, 팀장이 되고 나서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다. 감춰졌던 본모습이 드러난 것 뿐이다.
내가 직장 생활 중에 경험했던 직속 상사 중에서 직원들의 피드백을 듣고 달라진 이들이 있는지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명도 없었다. 사수였던 부장님도, 팀장님들도, 임원들도 한결같았다.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는 나의 리더가 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다. 애매하게 변해서 내가 헷갈리는 것보다는 그냥 예상 가능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B 팀장님은 늘 팀원들을 힘들게 했다. 가장 큰 이유는 늘 다른 팀의 업무를 받아와서 팀원들에게 던졌기 때문이다. 팀장 회의에서 업무 조정을 하면 늘 다른 팀이 진행했던 업무를 받아와서 팀원들을 좌절시켰다. 본인 입장에서는 업무를 더 가져와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우리 팀의 본연의 업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까지 받아왔고, 팀원들은 핵심 업무에 집중할 시간이 부족했다. 뒤돌아보면 B 팀장님은 몇몇 장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꼼꼼한 성격이어서 업무 특성상 실수가 용납되지 않았던 나에게는 배울 점이 있었다. 하지만 여러 장점들도 치명적인 몇 가지 단점에 묻혔다.
직장 생활에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면 조금씩 회사의 최고 경영진에게 눈길을 돌린다. 자신이 현재 회사에서 5년, 10년을 다닐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 중에 하나가 바로 회사 대표이다. 존경받지 못하는 대표 밑에서 일하는 것은 마치 선장 잃은 난파선에서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내 경우도 두 번의 이직 모두 회사 대표에 대한 실망감이 크게 작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결 같이 실망한 것은 아니었고 그분들로부터 배운 점도 없지 않다. 하지만 내가 상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에 대해서 여러 차례 실망했고 이 부분이 누적이 되면서 존경하는 마음보다 실망하는 마음이 훨씬 커졌다. 첫 회사에서는 대표가 직원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을 1%도 이해하지 못하는 점에 크게 실망했었고, 두 번째 회사에서는 대표가 직원을 존중하는 않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면서 마음을 돌렸다. 두 회사 모두 7년씩 다녔으니 기다릴 만큼 기다렸지만 그럴수록 상처만 커갈 뿐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지겨워서 떠난다는 직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이제는 질렸어요. 지겨워요’라고 말하며 떠나는 직원을 붙잡을 수 있는 말은 없다. 대신에 그 직원에게 결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좋은 선택을 한 것이라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자. 이성적으로 판단해보라든지, 조금만 더 버텨보라든지 하는 말은 머리로는 이해가 될지 몰라도 지겹다는 직원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다.
앞에서 언급한 ‘지겹다’의 사전 정의에서 유독 눈에 띄는 부분이 바로 ‘지루하다’는 표현이었다. 지겨워서 떠난다는 말은 변하지 않는 회사와 리더로 인해 회사 생활이 지루해졌다는 의미이다. 이를 곱씹어 보면 이제는 어느 당근책으로도 지겨워진 그들 마음에 열정을 불러올 수 없다는 뜻이다. 너무 늦었다는 말이다.
내가 후배들에게 했던 가장 큰 거짓말은 ‘회사가 변하고 있다’였다.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는지 고민하는 직원들에게 나는 회사가 직원들이 어떤 불만이 있는지 알고 있고, 조금씩 반영해서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회사의 변화 속도가 직원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었다.
문득 얼마 전에 내가 운영하는 경영잡지 토론 모임에서 ESG (환경, 사회, 지배구조) 관련 아티클을 다뤘던 때가 떠올랐다. 불과 3, 4년 전만 해도 대부분 ESG 콘셉트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지루하게 여겨 아티클로 선정하지도 않았다. 당시 기업들도 시큰둥하면서 보여주기 식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하루가 멀다 하고 ESG 관련한 뉴스가 나오고 기업들의 선택 요소가 아닌 필수 요소로 변해가고 있다.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도 모두 흥미를 가지고 참여했고 본인 회사의 사례들을 공유했다. 이날 모임을 통해 얻은 결론은 ESG의 중요성과 위험 요소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감하게 되고 또 이를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나오고, 관련한 법안이 신설되면서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기업과 사회가 변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변하지 않는 회사, 반복적으로 실망을 주는 리더들도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답답했던 회사의 프로세스를 객관적으로 한눈에 볼 수 있는 지표로 정리되고, 변화의 중요성과 그렇지 못했을 때의 위험 요소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유 및 교육한다면 이전보다는 빠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외국계 회사 시절에 대대적으로 사무실을 리노베이션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리노베이션의 핵심 중에 하나는 바로 팀장 자리를 없애고 구분 없이 앉는 것이었다. 담당자는 다른 외국계 회사를 둘러보며 벤치마킹을 했다. 외국계 스포츠 업계인 A사의 경우, 팀장 자리를 왜 없애야 하는지, 수평적인 문화가 왜 중요한 지에 대해 팀장급 이상을 대상으로 무려 6개월 동안 교육을 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나 팀장 자리를 없애고 수평적인 자리 배치를 했을 때, 별다른 내부 저항 없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의 경우 담당자가 최고 경영진에게 보고하고 진행하려 했지만, 사업 부문장 중 한 명이 자신의 사업부는 무조건 팀장 자리를 두겠다고 우겼고, 이를 지켜본 다른 사업 부문장들도 모두 마음을 바꿔 결국 모든 부서에 팀장 자리가 되살아나는 촌극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직원들의 실망감이 얼마나 컸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이처럼 회사의 규모가 커질수록 단기간의 변화가 어렵고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인내심도 필요하다.
‘지겹다’는 말처럼 부정적인 말이 없다. 몇 번의 시도를 했지만 달라지는 것이 없었을 때 나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지겨워서 떠나는 이들에게는 결코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자. 그리고 그런 이들이 더 많아지기 전에 변화의 중요성과 위험 요소를 공유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교육을 진행하자. 현재 자신의 직장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면 건강한 조직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Mark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