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 때문에 ‘성장’이라는 말을 쓰기가 그토록 조심스러울까
성장이 결국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는 게 아닌가‘라는 나의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누군가의 성장에 도움을 준다’고 했을 때 그의 성장이 과연 내가 준 도움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교육 담당자이지만 교육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은 지식과 정보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즉각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이 세상에 꾸준한 운동이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균형 잡힌 식단이 몸에 이롭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특정한 정보가 진정 나의 것이 되는 것은 그 정보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을 때이다. 의미는 교육 장면에서 강의나 교육을 수강하는 동료들과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새롭게 부여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삶에서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는 도전적인 상황을 해결하고자 할 때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에 새롭게 의미가 부여된다. 새로운 역할이 주어지며 마주하게 된 과제, 새롭게 시작하게 된 프로젝트 혹은 다른 사람과의 갈등 상황이나 환경의 변화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이러한 과제나 상황을 극복해나가기 위해 다양한 해결책을 탐색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정보나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들은 새롭게 의미가 부여되며 재해석된다. 교육에서 배운 다양한 지식과 정보, 방법론들은 이 과정에서 정보의 범위, 선택의 대안이 된다. 교육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즉각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문제 상황에서 고민할 수 있는 생각의 범위를 확장하고 세분화 할 수 있는 단서들을 제공해 준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변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를 선택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몫이다. 어떤 사람은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탐색하고 관점과 생각의 변화를 통해 스스로 행동을 변화시키겠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그저 지금까지 유지해온 습관과 관행대로 문제를 인식하고 특별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그에 따라 어떤 반응을 보이냐의 문제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다. 설령 조직 안에서 다양한 제도와 시스템으로 개인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유도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개인의 동의와 수용을 거치지 않은 것이라면 그의 행동은 역할 연기에 불과하다. 특정한 행동이 오직 타인의 강요와 지시, 혹은 어쩔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래서 당장이라도 쉽게 바뀔 수 있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성장과 변화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진정한 성장으로 인해 자리 잡힌 변화는 그가 가지고 있는 가정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질문이 들어오기 전까지 꽤 길게 유지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성공 방식과 규칙, 효과적인 문법을 적용해도 특정한 문제 상황이 해결되기 어려울 때 사람은 자신의 가정을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한다. 가장 효과적인 교육은 이 시점에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가정을 무너뜨리고 여태껏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새로운 가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쩌면 ‘맹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존성이 높았던 기존의 정보와 법칙을 의심하고 다시금 새로운 정보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고, 이해를 넘어 동의와 수용의 과정으로 넘어가 아주 작고 실험적인 실천을 하게 된다면 매우 훌륭한 교육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여정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정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질문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가정을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이 trigger(방아쇠)가 되어, 한 개인이 필요한 순간에 선택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대안들을 검토하게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육은 성장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다기 보다 ‘방아쇠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교육의 역할을, 특히 기업 교육이나 성인 교육의 목적을 ‘다른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까지 미처 해보지 못한 새로운 질문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타인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이 교육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실은, 내게 성장이라는 단어가 불편하게 들리는 모든 이유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교육 담당자로서 나는 무엇 때문에 ‘성장‘이라는 말을 쓰기가 그토록 조심스러울까?
그것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성장이 대부분 ‘미래적‘인 시선으로 ‘수직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한 잡지에서 아래와 같은 글을 찾을 수 있었다.
“방향이 아래를 향하더라도 너 스스로 뛴다면 그건 나는 거야”
이 말은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5번 레인>이라는 소설에서 ‘강버들’이라는 인물이 한 말이다. 작품 속에서 강버들은 촉망받는 수영 꿈나무였다가 체육 중학교 진학 이후 경쟁에서 버티지 못하고 결국 다이빙으로 종목을 바꾸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이제 더 이상 수영 꿈나무도 아니고 사람들의 기대에서 멀어진 강버들이지만 그는 현재의 삶을 이전에 비해 퇴보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현재 본인이 경험하고 있는 삶도 꽤 괜찮은 삶이고 충분히 가치 있는 삶으로 여기는 그의 태도가 위의 대사 안에 담겨있다.
‘성장’은 우리가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만 같은 왠지 모를 의무감을 부여한다. ‘앞’이라는 것도 실은 어디가 정확히 앞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지금 걷고 있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시선을 계속 전면을 향하게 만든다. 앞과 뒤를 구별하고 아래와 위를 구별하여 현재의 상태보다 나중의 상태를 ‘더 나은 앞’으로, ‘더 나은 위’의 상태로 정의한다. 만일 성장이 계단을 오르는 일이라면 우리는 끝없이 세상으로부터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게 되기도 한다. 계단의 끝은 어디인지,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정녕 내가 원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찰 없이, 다른 사람들이 지금도 계단을 오르고 있기에 나 역시 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큰일 날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지는 것이 마땅한 것이 되는 현실. 장밋빛 미래를 바라보며 현실의 희생을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 치부해버리는 현실. 어쩌면 그것이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현실이 아닐까?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다시 이렇게 되묻고 싶다.
‘지금과는 또 다른 현실이 미래라면, 도대체 그 현실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이냐‘라고.
‘변화’라는 말은 상당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말이다. 변화를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통해 조금 다른 현실을 만드는 일‘로 설명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위해 조금 더 현실에 집중하고 그 선택에 도움이 될만한 대안을 모색하지 않을까?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현재 스스로의 역할과 행동을 좀 더 깊게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교육 담당자로서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사람들이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다양한 선택의 재료들을 제시하고 그들이 필요할 때 그 재료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편안하게 때로는 용기 있게 새로운 재료를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이다. 아쉽지만 이미 성인이 된 우리들에게 선택과 결정을 강요할 순 없다. 필요한 상황이 되면 사람은 자신이 직접 선택할 수 있는 대안과 필요한 재료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성장은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은 선택의 대안들을 가지게 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만일 성장의 개념이 이렇게 정의된다면 그래서 앞과 뒤, 위와 아래와 같은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 좀 더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풍성함으로,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로워지는 문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된다면 나는 나의 일을 ‘타인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일’이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것이다.
브랜딩인가HR인가 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