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최소 1,000팀 이상을 직/간접적으로 검토를 해왔다. 어떤 팀은 사업은 좋은데 팀 역량이 부족해서, 어떤 팀은 역량은 좋은데 비즈니스 모델이 별로여서, 어떤 팀은 다 좋은데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어서 투자를 하지 못했다. 물론, 반대도 있다. 다른 요소들이 별로인데 어느 한 요소가 좋아서 투자를 결정했다. 이런 일들은 지난 몇 년 동안 반복되어왔다. 

성공하는 팀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성공하고,
실패하는 팀은 모두 다른 이유로 실패한다. 

투자를 하며 종종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라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는 말을 떠올립니다. 읽지도 않은 이 소설의 첫 문장을 기억하는 것은 이 ‘<안나 카레리나의 법칙>’이 담고 있는 바가 엄청나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그의 책 <총, 균, 쇠>에서 이 문장을 “결혼 생활이 행복해지려면 수많은 요소들이 성공적이어야 한다”로 해석한다. “즉 서로 성적 매력을 느껴야 하고, 돈, 자녀교육, 종교, 인척 등등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에 필요한 이 중요한 요소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만 어긋난다면 그 나머지 요소들이 모두 성립되더라도 그 결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안나 카레리나의 법칙>은 창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흔히 성공이나 실패를 간단히 설명하려고 한다. 그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팀’에 대한 신화다. ‘될 사업도 안 될 팀이 하면 망하고, 안 될 사업도 될 팀이 하면 흥한다’는 이 명제는 창업을 논하는 자리라면 어디서든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성공적인 창업이란 팀 역량, 조직문화, 타이밍, 경쟁자들의 대응, 정부 정책, 운과 우연 등 수많은 요소들이 결합된 결과이며, 어느 한 두 가지만 어긋나도 그 창업은 실패로 귀결될 수 있다. 

문제는 투자에 있어서도 <안나 카레리나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어 사실상 성공을 좌우하는 특정 요소를 꼽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해를 거듭해도 투자 결정은 늘 어렵다. 투자를 해도 해도, 창업팀을 만나도 만나도 여전히 어떤 팀이 성공할 것인지를 이야기하긴 어렵다. 상대적으로 어떤 팀이 실패하는 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다. 문제는 투자 성과는 수년 후의 사후 지표를 통해서나 확인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투자 이후의 시장 상황, 리더십/팀 역량의 변화, 운 등 정말 많은 요인들이 성공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당시의 판단만으로 온전히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투자 성과가 좋으면 불완전하고 미흡했던 투자 심의도 미화되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만전을 기했던 투자 심의도 미흡한 것이 된다. 

물론 모든 요소들을 사전에 고민하고 챙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심사역들의 전문성도, 배경도, 경험도 각기 다르기 때문에 투자 결정 당시의 정확도와 예측은 주관성이 많이 개입된다. 심지어 sopoong와 같은 액셀러레이터의 일이란 성공을 성공하게 만드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실패를 성공으로 만드는 것이 지향점이다. 단순의 사업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하나의 시도가 실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sopoong에서는 투자에 대한 모든 요소를 밝혀내기보다는 팀과 비즈니스에 대해 접근하는 ‘사고’와 ‘자세’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투자와 액셀러레이팅을 집중하고 있다. 투자심사역이 해야 할 일이나 액셀러레이터의 자세에 대해서도 계속 고민하고 수정해가며 lean 하게 접근하고 있다. 다음은 sopoong에서 심사역들에게 강조하는 것들이다. 

 

 

1. 다리 힘


현장에 답이 있다. 

창업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현장에 가야 한다. 정말 많이 들은 말이지만, 이 말을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책상 앞에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발품을 팔아야 한다. 생산공장이 있다면 공장에, 영업처도 함께 가보고, 고객들도 따로 혹은 함께 만나본다. 잘 모르는 분야는 전문가들을 찾아 묻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다리는 움직이라고 있는 것이다. 

투자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존경하는 투자자로부터 ‘게으른 투자자는 성공할 수 없다. 창업팀보다 부지런해야 하고, 그래서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투자 포트폴리오가 많아지면서, 점점 현장에 방문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투자 후에도 틈틈히 팀들의 사무실을 방문하고, 구성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노력한다.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잠재적) 고객들의 반응을 직접 확인한다. 

현장에, 그리고 투자팀의 사무실에 자주 방문하는 것이 투자자의 미덕이다. 현장에 가면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게 되고, 생각지 않았던 것들도 보게 된다. 알던 것도 직접 보면, 생각이 바뀐다. 

 

 

2. 엉덩이 힘


“의심하고 또 의심해”

해당 업에 대한 충분한 리서치와 분석없이 투자를 하는 것은 지도없이 모험을 떠나는 것과 같다. 익숙한 산업은 익숙한 대로, 익숙하지 않은 산업은 익숙하지 않은 대로, 최대한 분석을 해내야 한다. 리서치와 분석은 기본적으로 책상 앞에 얼마나 오래 앉아있느냐로 결정된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충분한 raw data를 모으고, 국내외의 사례를 모은다. 경쟁자 분석도 필수다.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없는 것은 대표자나 팀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지 않는 것이다. 팀에서 제시하는 수치와 근거를 꼼꼼하게 재확인 및 검증한다. 사업은 핵심 가설을 계속 검증해나가는 과정이고, 이 가설을 수립하기 위한 근거가 흔들리면, 가설은 설 곳을 잃는다. 투자 검토는 이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를 튼튼하게 만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비단 투자 검토를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엉덩이의 힘은 해당 업에 대해서 최소한 대표자 수준의 이해와 관점을 갖게 해준다. 일반적으로 액셀러레이팅이 성공하느냐, 아니냐는 심사역과 파트너들이 대표자를 뛰어넘는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느냐로 결정된다. 통상 경험의 영역은 파트너들이 담당한다. 파트너들은 풍부한 경험과 직관을 바탕으로 조언을 한다. 투자심사역들은 지식의 영역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시간을 들이는 것밖에 왕도가 없다. 

운이 좋게 이미 익숙한 산업 영역 내의 팀에 투자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 운은 오래가지 않는다. 오래가는 투자심사역은 엉덩이의 힘을 아는 사람이다. 

 

 

3. 믿음의 힘


바보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위험한 일에 기꺼이 도전한다.

투자는 창업자들을 믿는 것에서 시작한다. 창업자들은 종종 미치광이 혹은 바보들로 보인다. 그들은 믿음을 갖고 있다. 스스로를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믿음은 신념에 가깝다. 창업자들의 신념은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좇지 않을 목표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한다. 

투자를 한다는 것은 창업자와 같은 신념을 갖는 것이다. 이 믿음은 바보들의 손에 있을 때 훨씬 막강하다. 투자를 하기 위해서라면, 투자심사역은 바보가 되어도 좋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리서치, 분석을 통해 현실성을 가지면서도 바보의 맹목적인 믿음과 자신감을 겸비하는 것이다. 때로는 상식을 무시하고 맹목적인 믿음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특히 액셀러레이터라면 창업자와 같은 맹목적인 기업가정신을 가져야 한다. 

투자나 창업은 ‘조각가’의 일과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조각이란 돌을 깎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돌 속에 이미 내재해 있는 형상을 드러내는 것

미켈란젤로의 말입니다. 뛰어난 제품의 공통점은 이런저런 기능과 서비스를 여러 개 덧붙인 것이 아니라 핵심적 기능과 디자인에 집중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와 sopoong의 투자심사역들은 우리가 하는 액셀러레이팅이 팀에 없는 것을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원래 갖고 있던 것, 원래 지향하던 핵심을 드러내 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아침이면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듯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기업가적인 면모를 더 빛나게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한상엽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