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 엄청나게 바빴습니다. 나름 큰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서 정신없이 보냈는데요. 최근 겪은 내적갈등(?!)을 소개코자 합니다.
일이 긴급하게 진행하게 되다 보니, 여러 회의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도움받을 일이 있어 다른 팀의 후배님을 모시고 이른 아침부터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회의 말미에 그 후배에게 과거 프로젝트 자료를 부탁했습니다.
퇴근무렵이 되어서야 후배님은 자료메일을 보내주었습니다. 피차 바쁜데 빨리 못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저도 바빠서 그런 것 따질 여유도 없었고요. 그런데 메일을 받고 나서 저는 뒷목이 뻣뻣해 지는것을 느꼈습니다.
메일은 수신인(TO) 저, 참조(CC)로 그 후배의 팀 전체로 왔습니다. 제목은 ‘[전달] ~~ 프로젝트 파일’ 이었습니다. 첨부파일이 1개 있었고, 본문에 내용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네, 백지였습니다.
클릭해 보고 어라? 싶었지만 아.. 뭔가 잘못 보낸 것이겠구나 싶어 조금 기다렸습니다. 아웃룩 ‘회수’ 기능으로 다시 보내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런 건 전혀 없었고 사내 메신저를 보니 그 후배는 이미 퇴근했더군요.
저랑 매우 친한 후배였다면 차라리 이해하겠는데 회사 안에서 말 몇 마디 못한 후배였습니다. 좀 많이 충격이었습니다. 보통 바빠서 내용을 못쓰겠다면 사내 메신저로라도 “보내드렸습니다! 수고하세요!” 이렇게라도 말 할 수 있습니다. 외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터넷 게시판에서도 [냉무]를 달아서 내용이 없다는 걸 알려주는 예절이 있죠. 저는 혼자 오만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대체 내가 뭔가 잘못한건가? 이건 엄청난 결례가 아닌가? 하다못해 FYI (For Your Information) 이라도 써야 하는것 아닌가? 또 참조로 본인팀을 통채로 넣은건 뭐지?? 팀원들 보는데서 날 멕이는건가?? 회수할 시간은 충분히 주었는데. 뭐지? ‘
혼자 분노하다가 페이스북에 퇴근길에 주저리주저리 적었더니 지인들이 의견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9:1 정도로 ‘그 후배가 문제가 있다’ 였습니다. 소수의견인 1은 ‘바쁘다보면 그럴 수 있다. 요즘 애들 성향 생각해 보면 놀랄일도 아니다. 이해해야 한다’ 이런 거였습니다.
이후 며칠동안 그 후배를 지켜본 바 오해는 풀렸습니다. 이 후배는 저한테만 그런게 아니라 공평하게도 모두에게 그러고 있었더군요. (뭔가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특별히 저만 싫어했던건 아닌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일을 잘함에도 선배들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 후배였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이 후배는 그저 이런 부분을 못 배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변에서 조금씩 가르쳐 주면 더 많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며 성장할 것 같았거든요. 저야 잘 모르던 친구이니 그렇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왜 조언을 해 주지 않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배와 오랫동안 같이 일하고 있는 다른 동료에게 물었습니다. 저랑 비슷한 연배여서 편히 지내는 사람입니다.
왜 이런 부분을 Care 하지 않느냐 물었는데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습니다.
“아이고 길과장 말도 마..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 함부로 충고하면 꼰대, 라떼로 뒤에서 찍혀.
나도 그 친구 좋아하지만.. 쓴소리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 괜히 나서서 말했다가 굳이 젊은사람들 뒷담화에 올라갈 필요 없잖아?
그리고 막말로 내 친동생도 아닌데 내가 뭐하러 굳이 그렇게까지 해? 그럴 시간 있으면 주식 한번 더 보고 부동산 앱이나 더 보겠네.
길과장도 괜히 오지라퍼 되지 말고 하던 일이나 해. 좋은 소리 못듣는다고.”
동료의 말은 제게 꽤 충격이었습니다.
아 이 친구도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다들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뜨끔했습니다. 제 속마음도 들킨 것 같아서요. 저도 은연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 메일을 받고 열 받아서 바로 전체회신을 보낼까 싶었고 (참교육 시전), 다음날은 잠깐 불러서 커피라도 사주면서 이야기 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접었습니다.
‘내가 왜 굳이 내 아까운 시간과 노력과 커피값을 써 가며 내 평판에 상처날 수도 있는 짓을 하나’ 라는 생각을 저도 했거든요. 그리고 저 친구가 무슨 짓을 해도 ‘하하하’ 웃어주며 그냥 좋은 이미지를 주는게 훨씬 저한테 유리하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후배의 회사생활에 장기적으론 독이 될 줄 알면서도 말이죠.
후배들에게 ‘꼰대’ 나 ‘라떼’ 선배로 찍힐까봐 무서웠습니다.
꼰대라는 말은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꼬장꼬장한 어른, 특히 아버지를 낮춰부르는 표현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꼰대라는 말이 회사의 나쁜 선배를 통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라떼는 말이야 (Latte is horse !) 가 등장했죠. 외국인이라면 어리둥절할 이 표현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통쾌함을, 나이든 사람에게는 침묵을 안겨주었습니다. 네. ‘침묵’입니다. 라떼와 꼰대는 마법의 단어거든요. 선배에겐 무섭게 다가옵니다.
저도 젊은 세대였고, 지금도 마음은 젊다고 생각합니다. 40대 초인 제가 보기에도 요즘 2030은 힘들어 보입니다. 경쟁이 치열해지니 각박해지고 여유가 없어지겠지요. 소확행, 90년대생이 간다, 욜로(YOLO).. 모두 제게는 어찌보면 비명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성세대를 비판하면서 자존감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 끼어있는 저로선 그보다는 안타까움이 훨씬 앞섭니다.
후배는 ‘꼰대’에게 무엇을 배우고 싶을 것이며, ‘라떼’와 어울리고 싶을까요? 그렇게 ‘구분완료’된 선배를 대하는 후배의 태도는 당연히 변해갑니다. 후배가 선배를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후배들의 자유입니다. 문제는, 티가 납니다. 선배가 그걸 모르지 않는다는 거죠.
선배 입장이 되면 후배들의 마음속이 은근히 보입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군시절을 떠올려봅시다. 말년병장 시절, 이병/일병들이 왜 저러는지 대충 보이지 않던가요? 저도 저때 그랬으니 왜 저러는지 보일 수 밖에요.
지금 생각하면 꼬꼬마들 서열놀이같던 그 시절도 그랬을진데, 십수년을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게 안보일까요. 다 보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아 저 친구는 싹싹하고 잘하네. 키워주고 싶다.’
‘아 저 후배는 참 별로네. 굳이 시간내서 도와줄 필요는 없겠다.’
저도 회사생활 해 보니 후배님들 중에도 이걸 잘 알고 활용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슬기로운 회사생활을 하는 후배들은 매사에 싹싹하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평판을 관리해 나가고, 그렇지 못한 후배들은 점점 회사생활이 어렵게 느껴지죠.
결국 돌고 도는 것 같기도 합니다. 꼰대 라떼들도 한때는 똑같은 젊은 신입사원이었습니다. 그 말은, 지금의 젊은 피들도 2010년생, 20년생들이 회사생활을 할때는 꼰대소리를 들을 거라는 겁니다.
꼰대, 라떼도 좋고 자기주장 강한 신세대 신입사원 다 좋습니다. 다만, 선배사원들도 앞에선 허허 웃고 있지만 뒤에선 치열하게 손익계산 하고 있는 걸 잊어선 안됩니다. 그래서 꼰대와 라떼는 무서운 말입니다. 잔소리가 지나친 선배를 입다물게 하는 긍정적 효과도 있겠지만 진솔한 충고도 듣기 어렵게 만듭니다.
어쩌면 이 글 조차도 라떼, 꼰대의 잔소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덜컹 드네요 ^^;;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길진세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