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열심히 적었던 핀테크 흐름 살펴보기 글이 반응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1년에 한 번씩 쓰는 건 아니지만, 이즈음 한번 짚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2020년도 절반이 흘러가고 있죠.
딱 리뷰하기 좋은 시점입니다.
저야 업계에 있다보니 핀테크 전반의 흐름을 상당히 재미있게 봅니다만,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2019년과 2020년은 다른 해보다 큰 변화가 많았습니다. 주목할만한 점도 많았죠. 하나씩 볼까요?
1. PLCC의 대약진
PLCC는 Private Label Credit Card의 약어입니다. 개별 상표를 부착한 카드인데요. 그냥 스마일 페이 카드?! 라고 하면 훨씬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네, 옥션과 지마켓(E-Bay 그룹)이 적극적으로 밀고 있는 바로 그 카드입니다. 상당히 반응도 좋았죠. 개인적으로는 이 카드를 PLCC의 시발점으로 봅니다.
이 카드는 현대카드와 이베이 그룹이 함께 만든 카드입니다. 고객들은 사실 현대카드인지 지마켓 카드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카드 신청해서 받고 나서야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기존에도 제휴 신용카드라는 건 늘 존재했습니다. 비슷한 개념인 PLCC를 따로 떼어서 보는 이유는 PLCC는 해당 브랜드를 전면적으로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디자인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스마일 페이, 토스, 카카오 뱅크 모두 PLCC를 시작했습니다. PLCC는 그냥 봐선 제휴 신용카드 범주입니다만 핀테크 영역에서 의미 있는 접근입니다. 3개사 모두 신용카드 라이선스가 없어서 직접 신용카드 발급은 할 수 없습니다만 데이터 확보를 위해서 핀테크 기업들이 PLCC를 활용하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제휴사는 PLCC 사용 데이터를 분석해서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습니다. 옥션/지마켓은 자사 고객의 자사 외 사용 패턴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스마일 페이 카드를 주력으로 쓰는 고객이라면 하루 중 주로 거주하는 지역 (아마도 회사 근처가 되겠죠), 주로 사용하는 업종, 시간대 등등을 쇼핑 내역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훨씬 더 정교한 마케팅을 가능하게 합니다. 카드는 무궁무진한 정보의 보고거든요.
작년과 올해처럼 PLCC가 붐이 된 적도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재미있는 모델이 많이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전개되어 갈지 지켜봐야겠습니다.
2. 마이데이터는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작년 올해 계속 언론에 등장하는 4차 산업혁명과 핀테크의 총아 (같은 느낌인) 마이데이터! 사실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굉장한 기시감을 느끼거든요. CRM, 빅데이터의 계보를 잇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CRM이 처음 나왔을 때에도 엄청난 혁신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빅데이터가 한창 뜰 때는 정말 세상이 다 뒤집어질 것 같았죠. 결과는? 세상은 여전히 잔잔히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 이런 트렌드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기자, 교수, 이론가들의 영향이 큽니다. 실체를 냉정하게 보고 비평하는 목소리는 묻히죠. )
마이데이터는 자신의 개인 정보/금융 정보를 한곳에서 보고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 토스나 뱅크샐러드가 제공하고 있는 PFM(Personal Finance Management)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정보와 사업자의 정보를 결합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또 자신의 정보가 어디서 어떻게 유통되고 있는지 추적하고 허용 여부를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굉장히 좋고 미래를 바꿀 서비스 같습니다. 문제는 다들 밝은 면만 본다는 겁니다.
마이데이터에서 세상을 바꿀 BM이 나오려면 금융사에서 모은 데이터와 사업자가 기 보유한 데이터와의 융합이 필수입니다. 이 과정에서 고객에게 동의를 어디까지 어떻게 받을 것인지, 이렇게 만든 새로운 부가가치가 개인 정보를 침해하지 않는지 많은 이슈가 터져 나올 겁니다.
학교 시험 때 꼭 노트 필기 안 보여주는 깍쟁이 친구들 있지 않았나요? 마이데이터에서 똑같은 일이 생길 겁니다. 내가 가진 정보는 꼭 쥐고 최대한 안 보여주고, 남의 정보는 최대한 가져오려고 하는 거죠. 음식재료만 준비되면 레시피는 베끼기 쉽거든요. 이미 핀테크 앱들과 금융 앱들의 서비스는 비슷비슷합니다. 여기서 차별화는 결국 신선한 재료를 많이 준비한 사업자만 가능할 겁니다.
물론 혼란스러워도 언젠가는 자리를 잡을 겁니다. 그러나 워낙 민감한 법들이 걸려 있어서 21년 하반기는 되어야 실용적인 BM들이 나오지 싶습니다. 그 사이에 은행과 핀테크 업체 간 재료(?!) 빼앗아오기 싸움 구경도 재미있을 겁니다.
3. 결국 3강. 네이버, 카카오, 토스
88년부터 컴퓨터를 써 오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큰 패러다임 변화는 세 번 있었습니다. PC 통신의 등장, 인터넷 대중화, 모바일 확산인데요. 그때마다 기업들의 흥망이 반복되었죠.
PC 시절 철옹성을 구축한 네이버는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고, 모바일 초기 재빨리 메신저 시장을 점령한 카카오도 거대 그룹이 되었습니다. 그 틈바구니 사이에 토스는 송금수수료 부담이라는 출혈 전략으로 없던 시장을 만들며 치고 들어왔습니다.
2020년 핀테크 트렌드는 이 3개사를 빼놓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1 금융권 대형 금융그룹도 같이 경쟁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다르게 봐야 합니다. 혁신적이지 못하고 모바일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One of Them인 점 때문입니다. 오픈뱅킹이 되어서 타행 계좌를 보더라도 하나은행 App은 하나은행 서비스를 위해 있는 것이니 ‘많은 그들 중 하나’인 것이죠. 결국은 시장 내 Player이고 이해관계자거든요.
핀테크 3강은 특정 Player에 종속되지 않으며 세를 불려 왔습니다. 토스와 카카오가 인터넷 전문은행을 설립했지만 중립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건 그게 더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카카오는 카카오페이와 카카오 뱅크를 분리 운영하고 있죠)
3강은 각자 다른 전략으로 2020년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습니다. 격투 게임 좋아하세요? 몸집이 큰 맏형 격인 네이버는 진중하고 무거운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헤비급 경기는 보고 있으면 스피디한 감은 없지만 펀치 한방 한방이 무섭죠. 잽 없이 크게 휘두르는 스트레이트가 볼 만합니다.
반면 카카오는 안정적인 주인공형 캐릭터 느낌입니다. 모바일을 꽉 잡고 있다 보니 전략의 방향이 좀 다릅니다. 먹히는 기술로 상대를 차근차근 공략할 수 있습니다.
토스는 상급자용 테크니션 캐릭터입니다. 거친 모바일 앱 비즈니스 속에서 없는 틈바구니를 만들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이야 자리를 잡은 듯 보이지만 언제 어떻게 고객이 이탈할지 몰라 늘 긴장하고 혁신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빠르게 실험하고 안되면 빨리 포기하고의 반복입니다.
2020년-21년의 핀테크 시장은 3개 업체를 중심으로 흘러갈 겁니다. 물론 페이코, 핀크, 뱅크샐러드 등등 다른 핀테크 사업자들이 주인공 자리를 노리고 있습니다만, B2B가 아닌 다음에야 B2C는 채널 싸움으로 귀결될 터라, 이미 자리를 잡은 3개사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합니다. 혁신적인 기능으로 세상에 없던 핀테크 BM이 나타나는 시기는 지나고 있습니다. 보유한 고객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모양새가 될 것입니다.
4. 인슈어 테크(Insur-Tech). 캐롯의 등장
대한민국 핀테크를 논할 때 생각보다 인슈어 테크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간편 송금이나 간편 결제는 단골 메뉴입니다. 이이서 로보 어드바이저, 해외송금이 뒤를 이어갑니다. 간혹 레그 테크, 프롭 테크 이야기도 나옵니다. 하지만 인슈어 테크는 잘 안 나옵니다. 가시적인 핀테크 사례가 없었거든요.
그러던 차에 올해 초 캐롯 손해보험이라는 회사가 나타났습니다. 한화손보와 SKT, 현대차가 주주입니다. 사실 저도 이런 회사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지난 4월, 제 자동차보험 갱신을 하다가 알게 되었는데요. 당시 받았던 기존 보험사 견적 대비 40% 가까이 저렴했습니다.
와 이거 뭐지 싶은데 이름이 이상해서 (신성한 금융에 당근이라니! ㅋ) 살짝 고민했으나 가입하고 사용 중입니다. 캐롯의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면 캐롯 플러그라는 물건을 보내줍니다. 시거잭 전원으로 LTE 통신 모듈 + GPS 가 내장된 기기로 추정됩니다. 이 녀석으로 캐롯은 제 차의 주행거리와 경로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매월 후불로(?!) 보험료를 청구합니다.
15년간 자동차보험을 갱신하며 가장 혁신적인 고객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타 보험도 1년마다 운행거리에 따른 할인을 추가적으로 해 줍니다만 그걸 등록하는 것 자체가 귀찮았습니다. 또 일단 1년 치를 선불로 받아두고 나중에 돌려받는 구조도 마음에 들진 않았습니다. 캐롯은 이런 불편을 굉장히 세련된 방식으로 해결했습니다.
캐롯은 또한 자동차 보험 외에도 영상인식 기술을 활용한 휴대폰 파손보험, 스마트폰으로 On/Off를 조정하며 켠 기간 동안만 가입되는 애완동물보험, 레저 상해보험도 내놓았습니다.
캐롯의 시도는 보험업계에서도 흥미롭게 지켜보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슈어 테크가 기지개를 켠 사례인데 올해 말부터는 유사한 다른 시도도 많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소비자로서는 즐거운 일입니다.
5. 망할 줄 알았던 제로페이의 흥행
제가 카드사에 있기 때문에 제로페이는 출시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큰 걱정은 안 했습니다. 제로페이는 판매자를 고려한 결제시스템입니다.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는 구매자에게 혜택을 주는 결제시스템입니다. 쉽게 말해, 제로페이를 쓰는 것보다 카드를 쓰는 것이 소비자에게 더 이익입니다. 그러니 제로페이는 아주 특수한 전략이 아니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도 제로페이는 기존 시장을 비집고 들어오긴 했습니다만 (서울시 공무원의 업무추진비가 제로페이로 사용이 강제되었었거든요) 미미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제로페이가 2020년 코로나 사태가 시작되며 급격히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경기 부양을 위해 보조금을 얹어서 지역화폐를 활성화시켰는데 수단으로 제로페이가 활용되기 시작한 거죠.
예전의 지역화폐는 지류 상품권이나 선불카드 형태로 지급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받으러 오고 가는 불편함, 분실했을 때의 불편함 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모바일로 지역화폐 상품권을 구매하는 형태가 되면서 고객 편의성이 높아졌습니다. 돈이 풀리고, 이를 사용하는 결제수단이 나타나자 가맹점에서도 이를 받아들이려는 자발적인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네, 자발적인 움직임이 중요합니다. 동서고금 모든 결제수단은 이 과정을 거쳐야 궤도에 오르거든요.
C-19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지자체 지원금은 계속될 겁니다. 서울시민들 상당수는 이미 제로페이 App을 통해 모바일로 지원금을 수령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용경험은 장기적으로 제로페이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한 번이라도 고객이 경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코로나 덕에 제로페이가 이렇게 될 줄이야… 정말 세상엔 모를 일이 많습니다. 이제 한국 간편결제진흥원 (현 제로페이 주관사)의 고민이 깊어갑니다. 일단 외형확대에 성공한 제로페이를 어떻게 키워 나갈지 전략이 필요합니다. 흥미롭게 지켜볼 부분입니다.
6. 결론: 결국 플랫폼사가 다 해 먹게 될 겁니다
2020년을 절반 지난 시점에 제 눈에 띄는 이슈들을 짚어보았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업자들(?)에게 중요한 일이 더 많았다고 하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고객 입장에서는 답답했던 금융이 점점 개선되어 가니 좋은 일입니다. 기존 금융권은 점점 힘들어질 겁니다만.
정부의 정책기조도 그렇고, 실제로 모바일에 대한 이해도도 그렇고.. 금융권은 핀테크사를 따라가려면 힘들어 보입니다. 기존 금융권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이건 뭐랄까.. 시대의 필연이랄까요. 모든 분야에서 동일한데, 금융이 만드는 테크보다는 테크가 만드는 금융이 더 매력적입니다. 택시회사가 만드는 택시앱보다 카카오가 만드는 택시앱이 더 잘 되는 것과 같습니다. 모바일을 잘 이해하는 자가 하는 핀테크가 훨씬 무서운 겁니다.
최근 들어 금융권도 본격적으로 Digital Transformation을 논하며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전 직원이 강당에 모여서 파이팅을 외친다던가, 젊은 직원들과 임원들이 같이 청바지 입고 사진을 찍는다던가, 갑자기 파이썬 교육을 시킨다던가 하는 걸로 DT가 되면 좋겠습니다만, 아직 갈길이 멀어 보입니다.
이러는 사이, 금융은 고객채널부터 플랫폼사가 야금야금 먹어치워 갈 것입니다. 금융의 속성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숫자와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누가 해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시중의 A은행, B은행 등등이 비싼 모델과 이미지 광고로 잘난 척을 합니다만 사실 여신/수신 모두 이자율(숫자) 싸움인 것이죠.
그래서 그나마 금융을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플랫폼 사는 너무나 잘 알고 꽉 쥐고 있습니다. 이 차이로 결국 플랫폼사가 금융을 지배할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빠르냐 늦냐의 차이일 뿐이죠.
소비자는 즐겁게 이 상황을 보며 혜택을 누리면 됩니다. 2020년 여름, 이렇게 흘러가고 있네요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길진세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