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회사 블랭크
블랭크코퍼레이션은 신기한 회사입니다.
일단 주로 뭐 하는지 한눈에 잘 안 보이는 회사이며, 빠른 시간에 매우 급격하게 성장한 회사입니다. 복지가 좋기로도 유명하고, 뭔가 재미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스타트업계에 계시거나 SNS 광고를 잘 아시는 분들께는 매우 유명한 회사지만 ‘미디어커머스’라는 단어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이 아직 많습니다. 블랭크코퍼레이션은 미디어커머스의 대표주자 중 하나입니다.
#. 미디어커머스
미디어(Media)와 커머스(Commerce)를 결합한 합성어로 미디어 콘텐츠를 활용하여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는 형태의 전자상거래를 뜻하는 신조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을 돌아다니다 보면 재미있는 광고가 많습니다. 저도 짧은 동영상이나 구매 후기 등을 보고 혹해서 몇만 원짜리 물건을 바로 구매하는 경우도 많은데요. 미디어커머스 기업들은 주로 이런 것들을 잘합니다.
대표 상품으로는 퓨어썸 샤워기, 마약 베개 등이 있는데요, 사실 우리가 크게 신경 안 쓰는 품목들 이긴 한데 잘못 사면 불편함이 큰 상품들입니다.
미디어커머스 기업들은 물건을 직접 제조하지는 않지만 고객이 불편함을 가졌던 부분을 캐치하고, 시중에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는 제조업체를 발굴하여, 세련되고 보기 좋게 브랜드를 더하고, 재미있게 광고를 만들어서, 판매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판매하게 되면 미디어커머스 기업은 광고를 통해 직접 자사 사이트에서 판매되니까 유통 수수료(네이버, 지마켓, 쿠팡 등에 지급하는)를 절감할 수 있어서 이익률을 높일 수 있고, 자신이 직접 제조설비를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큰 투자비용이 없어서 좋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중소 제조업체들은 판매 활로를 찾게 되어서 좋습니다.
판매자나 납품업체 모두에게 win-win이 되는 좋은 비즈니스죠.
대표적인 기업으로 블랭크코퍼레이션, 에이피알, 브랜드엑스코퍼레이션이 있는데요. 3개 회사 모두 빠르게 성장했고 주식시장 상장(IPO)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냈던 블랭크코퍼레이션에게는 약간의 먹구름이 드리워졌는데요, 그것은 바로 2019년 재무제표 때문입니다.
#. 블랭크코퍼레이션의 2019년 실적
블랭크코퍼레이션의 2019년과 2018년의 연결손익계산서와 연결재무상태표는 위와 같습니다. (연결재무제표는 종속기업의 재무제표를 결합한 재무제표입니다)
대략 봐도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겠지만, 제가 재무제표를 통해 생각한 중요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매출의 정체와 손익의 악화
2019년의 매출액 1,315억 원으로 전기대비 4% 증가하였으나, 영업손실 90억 원으로 2018년의 134억에서 상당히 안 좋아진 모습을 보입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매출이 정체했다는 것이 첫 번째로 안 좋은 신호인데요, 회사가 2018년에는 전기대비 무려 144%나 성장했던 기업이기 때문에 그 효과가 더욱 커 보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전기보다 영업이익이 약 224억이나 감소해서, 적자로 돌아섰다는 사실인데요. 1,300억 원을 판매하는 기업이 어떻게 전기보다 비용이 2백억이 넘게 증가할 수 있었을지.. 그 이유는 판매비와 관리비에 있습니다. (판매관리비 주석 참조)
회사의 비용 항목에서 가장 중요한 비용은 광고선전비입니다만 전기대비 큰 변화는 없죠. 그러므로 손익이 안 좋아진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듯합니다.
가장 크게 변동한 항목은 급여와 지급수수료입니다. (급여 58억 원, 지급수수료 60억 원 증가)
지급수수료의 내용은 기업마다 워낙 다르고, 다양한 비용이 섞여 있는 계정이라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업종의 특성을 고려할 때 저는 이것을 오픈마켓에 지급하는 판매수수료라고 추정합니다.
매출액이 별로 안 늘었는데 판매수수료가 왜 늘었을까요?
이는 SNS의 광고효과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근거는 없는.. 저의 단순 추측입니다)
과거에는 광고를 통해 직접 자사 사이트로 들어와서 고객이 결제를 했는데, 광고가 지속되다 보니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 회사의 상품이 아니더라도) 페이스북의 재미있는 광고를 보고 이것저것 몇 개 사봤는데 만족도가 높지 않은 겁니다. 그러다 보니 광고로 직접 유입되는 고객의 수가 줄었고, 회사는 판매를 유지하기 위해 오픈마켓(네이버, 지마켓, 11번가 등)에 물건을 올려놓고 팔기 시작했고, 오픈마켓 매출의 비중이 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사 사이트야 별도의 판매수수료가 없지만 외부 오픈마켓의 경우 10% 내외의 판매수수료를 지급해야 하죠. 그러다 보니 손익구조에는 악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확장하고자 하는 회사의 열망이 컸던 것 같습니다.
2018년까지 매출이 매우 급격하게 성장했고, 이익도 크게 나니깐 직원을 많이 채용하여 다양한 일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자공시시스템에서 확인되는 2018년 임직원 수 112명 → 2019년 215명)
하지만 예상했던 만큼 2019년 사업이 성장하지 못하여 회사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2. 재고자산의 증가
제품을 파는 회사의 재무제표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재고자산의 추이입니다.
최근 3년간 회사의 재고자산의 규모는 다음과 같이 변합니다. 2017년_46억 → 2018년_87억 → 2019년_161억원.
매년 두배 가까이 재고자산의 규모가 증가하는데요, 2018년에는 매출이 그만큼 늘었으니 괜찮지만, 2019년에는 매출이 별로 증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늘었다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161억 원은 2019년의 손익을 기준으로 하면 약 4개월치 재고가 창고에 있다는 뜻입니다.
재고자산이 쌓이면 오랫동안 회사의 손익을 갉아먹습니다. 재고를 소진해야 하기 때문에 파격 세일이나 이벤트 횟수가 증가하고, 그러다 보면 고객들이 세일한 가격에 익숙해져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회사의 2019년의 매출원가율은 약 37%인데요, 2018년도에 비해 4%p 악화되었습니다.
3. 핵심역량은?
서두에서 설명드린 것과 같이 미디어커머스 기업은 두 가지의 영역에서 좋은 역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하나는 알려지지 않은 좋은 상품을 발굴하는 것
두 번째는 재미있는 광고를 통해 매출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광고를 만드는 것이 회사의 핵심 능력이고, 그 능력이야 정평이 나있지만 고객들의 sns광고 피로감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회사에는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상품을 발굴하는 것인데요, 자사의 기술 없이 좋은 상품을 계속 발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가 어떻게 보면 광고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 미래는?
기업의 미래는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재무제표와 기업의 상황을 통해 보면, 아래의 포인트의 변화에 따라 2020년 이후 큰 변곡점을 맞이하게 될 것 같습니다.
1. 콘텐츠 역량 강화와 해외사업
회사는 종속기업이 9개입니다.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 중에서는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그 목록을 보면 아래와 같은데요.
주로 콘텐츠 커머스에 집중되어 있고, 여행이나 엔터테인먼트 등의 신사업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만, 싱가포르 등의 해외 법인도 있습니다. 그중 대만법인의 경우 매출액이 120억 원을 넘는 등 유의미한 실적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국 회사의 가장 큰 역량은 콘텐츠인 것입니다. 회사 다양한 종속기업과 함께 통해 끊임없이 신사업을 하고 있고, 재미있는 콘텐츠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다만 그 콘텐츠들이 회사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하는가? 또는 별도의 수익모델로써 지속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하지만 콘텐츠가 가 충성고객을 만들고 그 고객의 시간들이 모여 돈이 되는 것이 지금의 시대이므로, 콘텐츠를 잘 만드는 것은 분명한 장점입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유의미한 매출을 발생시키고 있는 부분도 긍정적입니다. 사실 문화가 다른 국가에서 ‘재미’있는 콘텐츠로 실적을 내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크게 성장할 수 있다면 한국의 작은 시장을 넘어 크게 점프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2. 중요한 건 본진
이 회사를 보며 가장 크게 느끼는 점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업이 정말 빠르게 성장했고, 정말 많은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편으로는 2017~2018년의 급격한 성장은 이루었으나, 조금 더 단단하게 내실을 다지지 않고 너무 빠르게 다른 일들을 벌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이지만, 기업에게 있어서 비용은 늘리기는 쉬우나 줄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안전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본진을 단단하게 다져놓고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이는 전통적인 사업의 마인드고, 무릇 스타트업이라면 리스크는 당연히 감수하는 것이지 하면서 달려 나가는 것을 무조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꼼꼼하게 기업의 손익과 자금의 상황을 체크하고,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서 재무적인 효과를 고려하지 않고 기업이 운영된다면, 앞으로는 신나고 뒤로는 밑지다가 기업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블랭크코퍼레이션은 앞으로 크게 흥할 수도 크게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수시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CEO를 괴롭히는 잔소리꾼 한 명의 역할이 앞으로 더욱 커질 것 같습니다.
해당 글은 파인드어스 이재용 교육본부장과 모비인사이드의 파트너쉽으로 제공되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