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내 별명은 0.4프로였다. 전교 내신 석차 1등, 0.4%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동경하며 반항의 시기를 보냈다. 1학년 때는 성적이 많이 떨어졌지만, 2학년부터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공부해서 서울 사대문 안의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제일 친한 친구 그룹에선 나만 유일하게 나름 유명한 서울권 대학을 들어갔다. 이런 학창 시절의 경험은 내가 조금은 특별한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만들었다. 사실, 제주도 촌놈이 충분히 착각할만했다. 대한민국조차 우물 안인데 거기서도 제주도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쭐했으니 말이다.
군대에서 충실히 전역 후 계획을 세웠다. 흔히 말하는 좋은 직장을 목표로, 선배들과 여자 동기들이 준비하는 시험공부를 계획했다. 전역하자마자 FRM, CFA 시험과 동시에 최대 학점을 수강하며 기계처럼 공부했다. 1년간 매일 규칙적인 생활에 공부하면서, 학기 성적은 올 에이플러스가 나왔고 시험은 모두 합격했다. 그 과정에서 준비한 컨설팅 회사 인턴도 합격했다. 계획하고, 열심히 실행하니 내가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수 있었다.
가족, 친구들 모두 축하해 줬고 나도 기뻤다. 근데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계 같은 삶이 끝나고 인턴생활을 하며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공부만 할 줄 알았지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매번 실수하는 인턴 나부랭이였다. 거기다 매일 새벽같이 퇴근하며 문득 이게 정말 내가 원한 삶인가에 대한 물음이 나를 덮쳤다. 그날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가?
그러다 우연히 군대에 있을 때 매일 같이 쓰던 일기장을 다시 살펴봤다. 밤에 잠을 설치면서 나중에 내 사업을 해보면 어떨까?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쇼핑몰 사업을 해볼까? 이러면서 온라인 쇼핑몰 책을 사다가 뭐부터 준비하면 좋을지 계획했던 내용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때 가슴 뛰던 기억을 현재로 돌리고 싶었다. 그동안도 잘했으니, 내 사업을 한다면 잘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다시 무슨 사업을 해볼지에 대한 고민이 매일 밤 나를 따라왔다.
당시 같이 컨설팅을 준비하던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일단 저지르기로 했다. 그래서 같이 제주도에서 합숙하면서 전지를 펼쳐놓고 비즈니스 기회가 있는 사업이 뭘지, 우리가 좋아해서 잘할 수 있는 사업이 뭘지, 우리의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할 수 있는 사업이 뭘지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돈 버는 사업보다는 우리 주변의 음악하고 그림 그리는 친구들과 할 수 있는 사업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첫 창업이 시작되었다. 대학생 창업으로 돈도 없는데, 운 좋게 처음 지원한 대학교 내 창업경진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조금의 상금을 가지고, 학교의 조그만 공간을 사무실처럼 이용했다.
스타트업과 관련된 서비스에는 모두 채용 공고를 올리고, 어렵게 개발자를 구했지만 협업이 잘 되지 않았다. 어느 누구 하나 서비스 기획을 해본 적도 없었고, 개발자/디자이너와 어떻게 일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학교 도서관에 관련 있는 책은 다 찾아서 봤지만,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현업에서 일하는 분들을 페이스북 친구 요청을 하고 어렵사리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미국에서 엑싯하고 지금은 새롭게 스타트업을 하는 분을 만나 뵈었는데, 이런 준비 없이 창업한다고 크게 혼난 적도 있었다. 거의 6개월 동안 이런 삽질을 반복했다.
학교를 다니고, 공부할 때만 해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는데 스타트업을 하니 하루아침에 불효자가 되었다. 버는 돈도 없이 6개월 넘게 삽질만 하니 상금도 바닥이 났다. 공부할 때는 용돈이라도 받을 명분이 있었는데, 도저히 부모님께 용돈을 달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밤에는 과외를 하고 낮에는 정부지원사업과 투자자를 찾는 과정을 반복했다. 나중엔 개발자, 디자이너에게 줄 급여도 없어서 차용증을 쓰고 부모님한테 돈을 빌렸다. 내 첫 대출이었다.
첫 창업인데 꿈은 커서 글로벌 서비스를 목표로 했다. 첫 서비스는 아티스트들을 위한 소셜미디어였는데, 아티스트를 상대해서 모두가 생소해했다. 그러니 만나는 투자자들도, 정부지원사업의 심사관들도 우리의 미래를 밝게 보지 않았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내가 하는 얘기를 모두가 믿어줬고 나도 자신감에 차서 더 힘주어 말했다. 근데, 내가 만들겠다는 서비스에 대해서 IR을 하러 다닐 때는 그렇지 못했다. 누구 하나 우리말을 진심으로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았다. 당시에 선도벤처 연계 기술 창업 지원사업을 신청해서, 80여 개의 회사에 우리 서비스에 대해 피칭했다. 거기서 한 회사라도 괜찮은 서비스라고 하면,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근데 어느 한 회사도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날 공동대표 친구와 CTO를 맡던 형, 셋이서 강남역 근처에서 정말 끝없이 술을 마셨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서비스를 다시 피벗 해서, 지금의 재능마켓과 비슷한 형태로 제품을 다시 만들어갔다. 동료들이 적을 땐 내가 살던 집과 공동창업자 집에서 일했으나 팀이 6명으로 늘어나면서 새로운 사무실을 구했다. 개발자 2분과 파트타임 디자이너에게 급여를 주기 위해 기술보증기금의 대출도 받았다. 그리고 2015년 3월 말에 예정했던 제품을 론칭했다. 아티스트들, 투자자들, 비즈니스 관계자들까지 초대해서 론칭 파티도 했다. 나는 조급했다. 빨리 증명하고 싶었다.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고.
제품 출시 후, 냉정한 시장의 반응에 남아 있던 내 자존감은 바닥이 났다. 우리가 제품을 새로 만들든, 어떤 노력을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의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만드는지 아닌지가 중요했다. 우리가 만든 제품을 고객이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데, 한 달이라는 시간은 충분했다. 그간 제품 출시를 위해 받은 대출에 대한 부담감도 나를 계속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실망스러운 결과 속에 아무 말 없는 동료들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그렇게 무너져갔다.
시험 준비할 땐 책에 나와 있는 대로 공부만 하면 결과가 잘 나왔다. 근데 창업은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법,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만드는 법에 대해서 글을 쓴 게 있으면 다 찾아 읽었다. 그렇게 해서 될 게 아니었으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졌다.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렇게 수중에 남아있는 돈을 끌어모아, 버스를 타고 경주로 갔다.
5월 초에 꽤 더웠던 경주를 1박 2일 동안 걸어 다녔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온종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만든 제품은 잘 안되었다. 첫째, 대표로서 내 역량이 부족했다. 둘째, 팀의 역량이 부족했다. 셋째, 내 역량과 팀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 서로 너무 좋아하고 아끼는 동료들이었지만, 이대로 가면 서로 미움만 남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1년 8개월의 여정을 마쳤다. 이 여정은 너무나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나”에 대해 이해하고 앞으로 어떤 방향성으로 살아갈지에 대한 실마리를 주었다. 그간 살아왔던 약 30년간 내가 어떤 착각 속에 살아왔는지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여정이 되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뒤늦게, 또 일찍 깨달았다. 난 전혀 특별할 게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해야 된다는 뚜렷한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매트릭스의 빨간약처럼, 난 착각 속에 살아가는 것보다 진실을 택했다.
장한솔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