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Persona)란 가면이라는 뜻이 있다. 우리가 상황에 맞게 사회적 가면을 바꿔쓰듯이, 특정 상황에 맞는 특정한 인물상을 페르소나라고 부른다. 사업에도 마찬가지로 페르소나가 있다. 그 사업 아이템에 딱 맞는 타겟 대상이 있다. 흔히 성공한 창업가나 VC들이 ‘고객 중심으로 하라’라고 하는 말은 ‘페르소나 중심으로 하라’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내가 관찰해온 바로는 수많은 창업가들이 페르소나 몰래 은밀하게 창업한다. 자신의 아이템은 세상에 없던 대박 아이템이기 때문에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사업 내용을 대기업이나 다른 누군가 알게 된다면 카피캣 당해서 아이템을 빼앗길 거라고 두려워한다. 그들은 심지어 페르소나도 모르게 6개월~1년 동안 창업을 준비한다. 그리고 브랜딩 콘셉트과 로고 디자인, 홈페이지, 애플리케이션 개발까지 다 한 뒤에 그랜드 오픈하고, 망한다.

 

“분명히 잘 팔릴 거야!”

 

그동안 1,500명 이상의 창업가들을 대면했다. 특히나 예비 창업 단계의 창업가들이 많았다. 그들은 심지어 누가 보더라도 엘리트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똑똑했고, 스펙도 좋았다. 해외 명문대 출신, 대기업 출신, 임원 출신, 20년 차 기술자, 교수 등 누구보다 똑똑한데 일도 잘했다. 그러나 창업 지원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공감할 것이다. 똑똑한 사람 1,000명이 있으면 거의 1,000명이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많은 이들이 페르소나를 만나보지 않는다. 이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창업에 성공하고 유니콘 기업을 만드는 비법 같은 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한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 창업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 그래서 정답이 없는 오답의 영역을 어떻게 검증해나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안다. 즉, 성공보다 성장이 중요하다.

모든 성공한 창업가들은 ‘운이 좋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공을 묻는 게 아니라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면 절대로 ‘운’이라고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연구 용역을 맡으며 인터뷰했던 창업가들, 연사로 모셨던 분들, 코치진으로 섭외했던 분들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된 메시지를 이야기한다. 그 내용을 정리해본다.

※ 글에서 다루는 ‘창업가’는 예비 창업 단계의 창업가를 타겟으로 썼다.

 

 

많은 이들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려고 창업한다.

 

창업을 하는 이유는 다양한데 보통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자기가 하고 싶은 아이템이 명확해서 그 창업 아이템을 만들어보고 싶거나, 다른 하나는 자기가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좋아서 창업이라는 방법을 선택하거나 한다. 두 경우 모두 공통적으로 ‘자기가 뭔가 만들어보고 싶어서’ 창업한다는 점이 같다.

그러나 CB인사이트에서 조사한 ‘스타트업이 실패하는 이유’의 압도적 1위가 “시장이 원하지 않는 제품”이라는 것을 창업가들은 이미 알고 있다. 시장이 원하지 않는다는 건 페르소나(고객)가 필요로 하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시장 수요가 없다. 창업가들이 이 조사자료를 모르고 있을까? 절대 아니다.

창업을 처음 해보는 창업가들은 창업하는 내내 스스로를 합리화하게 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창업에 대한 환상이 있기 때문에 자기 창업 아이템을 끊임없이 합리화시킨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애착이 강한 만큼 더더욱 “고객도 이 아이템을 좋아할 거야, 싫어할 이유가 없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이 페르소나 중심으로 창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면 부류가 갈린다.

 

1) 지금 강점/차별점으로 꼽으신 내용은 고객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인가요?

 2) 그게 다른 제품이 아니라 이 제품을 구매하도록, 마음을 돌릴 정도로 그들에게 중요한 요소인가요?

 3) 실제로 고객을 만나서 검증해보셨나요? 고객들이 정말 좋아하나요?

 

  • 자기 아이템에 애착이 덜한 창업가는 첫 번째 질문에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자기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창업가는 첫 번째, 두 번째 질문에서 곰곰이 깊게 생각해본다. 다시 재고해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성장한다.

  • 자존심이 강하고 똑똑한 창업가들은 두 번째 질문에서도 ‘문제없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들 중 열에 아홉은 최근 한 달 사이에 고객을 만나본 적 없다. 세 번째 질문을 던지면 그들은 기사 자료나 통계, 논문 자료를 언급하기 시작한다. Z세대가 어떻고, 1인 주거 문화가 어떻고, 4차 산업혁명이 어떻고, 메가 트렌드를 언급하며 논리적으로 완벽한 자기 아이템이 공격당했다는 것에 굉장히 불쾌해한다.

 

특히 세 번째 질문에서 논문이나 통계, 기사 자료를 가져오는 사람들은 설득하기 힘들다. 자신의 아이템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인 구조’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 논리가 현실에선 먹히지 않는 게 문제다. 하지만 ‘논리와 완결성’을 중요시하는 이 부류의 똑똑한 창업가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퀄리티를 갖춘 뒤에야 현장 검증을 나선다. 로고도 만들고 애플리케이션도 개발하고 난 뒤에야 제품을 테스트한다.

그러나 페르소나에 대한 상식과 연구 자료들은 정확한 타겟 페르소나의 현실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1인 주거인들이 외로움을 느낀다는 기사 자료를 근거로 1인 주거인끼리의 커뮤니티를 만들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앱까지 개발했는데 아무도 가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외롭긴 하지만 부담스럽게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기업은 절수기 키트를 만들어서 판매하려고 했다. 패키징까지 예쁘게 만들고 나서 고객들에게 일단 사용성 테스트를 위해 무료로 설치해 주려 했다. 그러나 단 한 집도 설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가 딱히 물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물을 펑펑 쓰는 집이라도 자기가 물을 얼마나 쓰는지 모른다. 그래서 ‘공짜로 준다는데도’ 한 명도 쓰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공짜를 마다하는 게 말이 되는가?

페르소나가 우리 상식과 다른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가치 소비가 유행한다길래 제품에 스토리를 입혔는데 정작 아무도 안 산다. 실제로 가치 소비를 즐기는 20대 여성의 구매 유인은 스토리도 좋지만 알고 보니 ‘제품의 무게’가 핵심 변수였기 때문이다. 현장에 나가보면 우리 일반 상식이나 아무리 똑똑한 사람의 논리적 추론도 틀리는 경우가 많다.

 

 

정리하자면, 얻을 수 있는 인사이트는 두 가지다.

 

1)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페르소나가 원하는 것을 만든다.
2) 페르소나에 대한 ‘가설’을 현장에서 검증한다.

 

창업을 경험했던 재창업가들은 대부분 공감한다. 겪어보기 전에는 자기가 나름 페르소나 중심으로 창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내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들려고 스스로 합리화한 점이 많았으며, 페르소나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실제로 시장에 내놓고 보니 별로 좋아하지 않았더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는다. 아무리 정부 지원금을 더 받아서 마케팅 비용을 태우고 프로모션을 돌려도 성과가 늘지 않는다. 그걸 직접 경험하며 돈과 시간, 노력을 날리고 나서야 후회한다.

나는 창업에 성공하는 비결은 딱히 모른다. 그러나 내가 모셨던 창업가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고객에 대해서만 1시간이고 10시간이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고객 이야기를 했고, 전혀 다른 주제를 얘기하다가도 ‘우리 고객들은-‘으로 돌아왔다. 그들 중 고객을 만나보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없다.

 

“우리 고객님은…?!”

 

간단한 원칙은 페르소나를 끝도 없이 만나고 분석하는 것이다. 정답이 없는 영역에서 내 사업에 대한 인사이트를 뽑아내고 성장하려면 현장 경험을 늘려야 한다. 그렇게 자기만의 원칙과 인사이트를 정리하면서 사업이 성장한다. 정작 ‘대박 아이템’인 줄 알았던 아이템들은 며칠만 지나도 전혀 다른 아이템으로 바뀌어 있다. 그걸 피벗(pivot)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대박 아이템’이라는 건 없다고들 한다. 자기 사업 내용은 세상에 없던 대단한 기밀이어서, 대기업이나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건 굉장히 아이러니한 얘기다. 인류 역사상 손꼽을 천재가 아닌 이상 세상에 없던 아이디어는 없을뿐더러, 고작 아이디어나 말 몇 마디 가지고 아무나 따라 할 수 있으면 무슨 사업을 하든 카피캣 당하고 망한다.

물론 스타트업 아이템을 뺏어 먹는 뭣 같은 기업이나 투자자가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뺏겨선 안 될 부분과, 별로 대세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부분은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고작 아이디어 몇 마디 따위로 뺏기는 아이템이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OO 플랫폼이라고? 정말 혁신적인걸? 당장 뺏어 먹자!” 하는 기업이 어디 있나. 어차피 시장에서 경쟁해야 한다.

그러니까 예비 창업 단계에서는 자기 혼자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골방에 갇혀있는 것보다는 최대한 다양한 사람의 피드백을 듣는 게 더 빠르게 성장하는 길이다. 창업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자기만의 답을 어떻게 더 빠르게 찾아나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소모해버리기 전에 인사이트를 얻어내는 게 린 스타트업(Lean startup)의 핵심 아닐까.

 

 

오랜만에 봤는데 카페에서 각자 일하고 있음

 

뜬금없지만 나는 창업가들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주변에 나와 친한 사람은 거의 다 창업가다. 나는 창업가들이 각자 원하는 목표를 이루었으면 좋겠고, 불필요한 시행착오 비용을 줄였으면 좋겠다. 이런 글을 적는 것도 수많은 창업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실수를 또 누군가가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금도 카페에서 창업가 두 명이랑 커피 마시고 있다.

내가 했던 일은 창업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실수가 무엇인지 공유해 주고, 자기 사업을 객관적으로 보기 힘든 창업가들에게 자기 사업을 다시 돌아볼 수 있도록 촉진시키는 일이었다. 이는 우리가 아는 교육, 티칭(Teaching)과는 다른 코칭(Coaching)의 영역인데 각각의 전문적인 기법이 다르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는 코칭 이해도가 대중적이지 않아서 그냥 창업 교육을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어쨌든 내가 대단한 지식이나 노하우가 있어서 이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창업가들이 실패하거나 시행착오를 겪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소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굳이 겪을 필요가 없는 시행착오는 겪지 않는 게 좋으니까. 이러한 낭비가 쌓여서 사회적 비용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창업 지원금으로 소모되는 예산이 적지 않다. 반복되는 실수는 반복되지 않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참 좋겠다.

 

 

유디V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