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적 기업 문화란 무엇일까
얼마 전에 예전에 다니던 회사 동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 주제는 역시 회사였지요. 저로서는 전에 다니던 회사가 잘 되어야 제 커리어에도 도움이 될 일이니 바뀐 회사 모습이 좋아졌기를 내심 기대하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회사는 분명 좋아졌습니다. 제가 다닐 때에 비해서 많은 부분이 달라졌습니다. 특히 직원들의 근태에 대해 겨우 법에 저촉받지 않게끔 정부 방침에 잘 맞춰 나가는 내용은 예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퇴근 시간이 되면 아예 강제적으로 소등을 하고 예전같으면 눈치볼 연차도 이제는 샌드위치 연휴면 알아서 강제 연차 등록을 해 준다는 말을 동료가 할 때 말하는 사람의 눈빛은 실로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많이 바뀐 것이거든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저도 회사의 변화에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뭔가 씁쓸함이 밀려들었습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와 비교할 때 예전 회사의 변화는 뭔가 근본적인 변화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런 기업들이 적지 않습니다. 기존에 야근이 당연시 되던 기업이 최근 정부 업무 시간 방침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사무실 전원을 내리고 안하던 휴가나 업무 탄력 시간을 적용하는 등 안하는 회사보다 분명 나은 모습으로 바뀌고 있는 회사들이 많습니다.
업무 시간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 수평적이고 합리적인 기업문화로 바꾸는 계기가 되자고 말하죠. 직원의 자율성을 높여 창의적인 업무 환경이 되게 하고 불필요한 회의나 보고를 없애서 그럴 여건을 마련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전 직장도 그랬습니다. 사실 이런 변화가 처음이 아니었으니까요. 제가 재직하던 때에도 몇 번을 이렇게 했습니다. 야근을 하는 사무실에서는 불이 꺼져도 침침한 눈으로 일을 하던 마치 오징어배 선단 같은 동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퍼포먼스는 지속되지 못하고 곧 제자리로 돌아오기 십상이었습니다. 물론 처음 취지인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습니다. 사실 몇몇은 이런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과거 관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최근의 과감한 근태 변화는 외형적으로 혁신적인 것처럼 보이는데요. 과연 그럴까요?
지금 제가 다니는 직장은 강제 소등도 강제 연차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업무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전 직장에 비하면 저녁이 있는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태에 대해서는 만족도가 높죠. 그렇지만 야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진척도에 따라서 자원해서 오랜 시간 야근을 합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두들 평소에는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지만 누가 말하지 않아도 바쁠 때는 자진해서 야근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만인 사람은 크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참고 : ‘칼퇴근 해라’ 강제 소등에 매일 문자메시지까지
(최근 이야기인듯 하지만 10년도 더 된 기사입니다. 그 사이 변화가 있었나요?)
자율과 책임
지금 제가 다니는 직장은 직원들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휴가도 자유고 업무 시간도 법정 시간 외에는 자율적인 선택을 합니다. 겉만 자율인 전 회사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책임이 있고 기한이 있죠. 언제까지 무엇을 하겠다라고 계획을 하면 중간에 바뀌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룰을 정하고 경기장을 만든 다음 직원들은 시간동안 경기를 합니다. 경기장 안에는 누구도 난입하지 않습니다. 목표된 시간에 골을 넣으면 됩니다. 약속된 플레이는 약속된 결과를 보통 가져옵니다. 퍼포먼스의 성과는 결과로 드러납니다. 누구나 그 결과의 성취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가 다 좋지는 않습니다. 이런 좋은 문화를 해치는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 경기장에서 플레이어가 플레이에만 집중하고 그 안에서는 자율적인 선택을 할 수 있고 근태도 물론이라는 점은 전 회사와 확연히 다른 점입니다.
반면 전에 다니는 직장은 지금도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업무 시간이 끝나면 강제 소등을 하고 샌드위치 연휴를 강제로 쉬게 하지만, 이것 역시 개인의 선택을 방해하는 행위입니다. 단지 ‘일한다’와 ‘쉰다’의 차이일 뿐이지 모든 것을 회사가 정해주고 있는 셈이죠. 경기장도 회사가 정해주지만 언제든지 경기장에 개입도 회사가 할 수 있습니다. 근태는 그런 모습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정해줘서 지금은 쉬지만 또 안 쉴 수도 있는 날이 다시 올 수도 있다는 것이죠. 강제적인 뭔가를 계속 가져간다는 것은 문화가 성숙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책임도 흐릿합니다. 결과물도 매번 바뀝니다. 중간에 누군가가 개입해서 계속 결과물의 형태나 주제를 수정합니다. 기간도 당기고 늘리고 하면서 아무리 변화 지향적인 업무 방법론을 쓰더라도 실무자에게 혼란을 주는 지나친 경우가 많습니다. 업무 계획 기간이 2달이라고 해도 실제 이 주제를 이렇게 한 것은 몇 주 밖에 안되는 일이 많습니다.
이런 문화는 업무 뿐 아니라 이 회사 구성원의 일상에도 만연해 있습니다. 갑자기 미팅 시간이 바뀌는 일이 잦다든지, 작은 부서 행사에도 방향성이 급작스레 바뀐다든지 하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느끼는 부분부터 이 회사는 시나브로 직원에게 ‘이건 정당한 수정사항이야’라는 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직장을 와서 꼭 계속 바뀌어야 좋은 성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경험으로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바뀌는 일정과 주제가 결과물에 대한 참작과 모호한 책임을 낳는 것은 부가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사실 회사의 방향도 그렇게 많은 전략 수정을 거쳤지만 실제 도움이 된 것은 오래 준비하고 한 번 바꾼 것 정도니까요. 대부분의 시간은 지향점을 모른채 허우적거렸습니다.
제도를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휴리스틱 로직에 따른 기존의 많은 업무들이 최근 데이터 자체가 주는 인사이트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몇몇이 기존에 만든 인위적인 법칙이 제대로 검증받아서 사라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저항하는 몇몇의 기존 로직과 데이터들의 기득권은 회사 내에서 마지막 저항을 하지만 이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대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최고의 효율과 최대의 효과를 지향하는 기업이 그렇게 외부적으로는 정부의 개입과 인위적인 시장 제도에 대해 뭐라고는 하면서 기업 내부에 자생하고 있던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시장 지향적으로 나아가지 못했는지 모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객이나 직원이 선택할 수 있게 만드는 영역이 커지는 게 기업활동에 반대가 되고 전략적 움직임을 갖는데 지장이 되는 것일까요?
최적의 자원 배분에 대해, 최고 효과의 서비스에 대해 고민하던 많은 기업들이 최근 알게 된 해법 중 하나는 프로세스의 마지막 단계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율권을 크게 주는 것. 즉, 시간상 앞에 있던 권력을 가장 뒤, 매출이 발생하는 프로세스로 넘겼다는 것입니다. 제품과 서비스는 유저가 직접 선택하는 샤오미 방식으로 바뀌어 빠른 개발과 피드백으로 변화하고 있고, 세계적인 의류 업체들은 재고 관리의 해답을 매장에서 실제 팔리는 양을 토대로 추산하든지 영업 현장에서 재고 컨트롤의 권한을 많이 갖는 등의 방법으로 ‘중앙 권력의 전능함’이라는 기존 명제를 깨트렸습니다. 기업의 방향성은 필터일 뿐이고 역량 안에서 권한의 조정에 따라 풀리지 않았던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이죠.
최근 걱정 되는 것은 또 하나의 빅브라더 ‘빅데이터’입니다. 다시 권한을 중앙 중심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자율적 기업 문화를 계속 보전하고 있는 기업은 이런 고민이 덜할 것이지만 이제 막 직원 주도의 자율적 기업 문화를 시도하는 기업에겐 전방위적으로 데이터 분석의 결과를 밀어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출시할 컨텐츠나 재고관리, 자금의 결정 권한 등 데이터 분석 결과에 따라 중앙 조직이 다시 권한을 가질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업 내부적으로 현장 중심의 자율성과 데이터 활용을 어떻게 같이 가져갈 것이냐가 중요한 질문이 되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할 일, 데이터가 할 일을 사전에 업무 분장하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죠.
글을 마치며
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에 다니던 회사가 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곳에서 하지 못했던 일을 찾아 이직을 했지만 그 바람은 변함 없습니다. 자율성이 경쟁력의 소프트파워라는 의식은 기업가 정신이 있는 기업에게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있을 때만 조용히 열매만 취하고 사라질 생각의 관리자들이 득세하는 기업에서는 이런 질문 자체가 역린이겠지만요. 더불어 자율성을 얻기 위해 일을 하다가 찍힌 직원들을 생각합니다. 전략적에서의 이탈 여부를 두고 생각해보더라도 우리가 알던 전략이 정말 전략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갖게 됩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 옆 회사 이름을 적어도 어색하지 않은 보고서, 그런 방향성을 전략으로 갖고 그 속에서 다른 주장을 펼쳤다는 이유로 찍힌 자율적 인재들 중 일부는 지금 다른 곳에서 잘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강제 연차, 강제 소등 이런 거 없이 말이죠.
PETER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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