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를 그리다 팀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아침 9시 40분, 출근길에 덜컹거리는 칼트레인(CalTrain)의 2층 객차에서 이 글을 쓴다. 9시 40분에 출근을 하는 이유는 9시 이전에 샌프란시스코 방향의 기차가 너무 붐비기 때문이다. 같은 길을 출근길에 운전해서 가면 1시간이 넘게 걸리기 때문에 많은 직장인들은 출퇴근에 기차를 이용한다. 회사에는 아마 10시 반쯤에 도착하겠지만 기차 안에서도 일을 할 수 있고, 사실 내가 언제 출근하든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실리콘밸리에서의 삶은 출근길부터 만만치 않지만, 많은 테크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어떻게든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자유를 부여한다. 내가 미국에 온지는 11년, 하지만 아내와 함께 실리콘밸리에 온지는 갓 1년이 넘었다. 그동안 전직, 이사, 첫 아이 출산 등등으로 바쁜 한 해를 보냈지만, 실리콘밸리의 문화를 어렴풋하게나마 경험했다.
상대적으로 작은 도시인 시애틀에서 이주한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대해서 받는 인상은 전반적으로 바쁘고 경쟁적인 도시였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기업 문화 및 근무환경 역시 회사마다 다르다.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기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후 시애틀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에서 검색 관련 연구자로 일을 해왔다. 2016년 말 MS에서 입사 5년을 앞둔 삶은 참으로 편안했다. 회사 업무 이외에도 ‘창발’이라는 한인 IT 종사자들의 비영리단체를 만들고, 아내와 각각 책을 한 권씩 출간했다. 익숙한 환경에서 연구자로서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논문도 쓰고, 남는 시간에 시애틀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편안하게 사는 삶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도전을 찾아 작년 초에 스냅으로 회사를 옮겼다. 생긴 지 5년도 안되었지만 항상 화제의 중심에 있는 젊은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경험이었다. 입사 직후였지만 IPO의 흥분도 맛보았고, 곧이어 경쟁사의 압박과 회사를 전통적인 SNS의 잣대로 평가하는 언론의 영향으로 회사의 평판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도 경험했다. 이 와중에 첫 아이가 태어났고, 시애틀에서 LA로, 그리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은 덤이었다.
스냅은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회사라기보다는 실리콘밸리의 이단아에 가까운 회사다. 스냅의 CEO인 에반 스피겔은 제품 디자인 전공으로 엔지니어가 중심이 되는 실리콘밸리의 문화를 탈피하기 위해 LA에 본사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회사가 성장하면서 데이터와 엔지니어링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으며, 따라서 2016년부터 실리콘밸리 오피스를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현재는 100명이 넘는 직원들이 검색 및 추천 등 데이터가 중심이 되는 기능을 개발하고 있다.
스냅과 같이 젊은 회사의 데이터 과학자로 일하는 것은 바쁜 일이다. 업무 영역도 넓고 제품 자체도 끊임없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SF 오피스의 동료들은 스냅챗 사용자들 만큼이나 열정적인 사람들이다. 이처럼 열정적인 사람들 곁에서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열심히 일하게 된다. 그리고 서두에서 밝혔듯이 회사의 문화는 매우 자유로운 편이라 언제 어디서 일을 하던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출퇴근 거리가 긴 나의 경우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집에서 일하고 있다.
스냅의 SF오피스는 만들어진지 2년이 채 안되었고 검색 및 추천 등 스냅의 핵심 데이터 프로덕트를 담당하는 만큼 구글, 페이스북 등 더 크고 안정적인 회사에 있다가 새로운 도전을 찾아 스냅챗에 조인한 엔지니어들이 많다. 다른 회사에서 이직한 동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실리콘밸리의 많은 회사들은 스냅만큼은 아니더라도 성과를 내기 위해 오랜 시간 일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닌 것 같다. 단 모든 직원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본인의 선택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에 대해서 큰 불만은 없어 보였다.
아시아계 엔지니어들의 유입으로 백인이 오히려 소수가 되는 현상은 테크 회사에서는 이미 흔한 일이다. 한국인은 어디를 가나 소수니 별 상관은 없을 수도 있지만 끼리끼리 어울리는 경향이 강한 중국계 직원이 주류를 차지하는 분위기는 비주류 입장에서 편안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10년 전에 와서 이미 다양한 환경을 경험했던 입장에서는 미국 문화의 근간인 다양성의 존중과 장려가 왜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실리콘밸리의 장점으로 흔히 말하는 수평적이고 자유롭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는 일반론이며, 실제로는 회사 및 일하는 팀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이다. 오히려 다양성 측면에서는 아시아계 이민자가 다수가 되면서 실리콘밸리의 문화 전체가 아시아화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또한 이런 개인에 대한 존중은 필연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수반하며, 미국 회사들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개인이나 팀에 대해 책임을 분명하게 묻는다. 넷플릭스는 직원들이 ‘프로 스포츠 플레이어’처럼 생각하기를 바란다는데, 그들에게 주어지는 명예와 돈만큼이나 성과에 대한 압박이 주어진다.
실리콘 밸리에서 살아가기
교외의 넓은 집에 거주하면서, 일은 업무시간에 끝내고 그 이외에는 가족과 함께 여유 있게 여가를 즐기는 미국적인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실리콘밸리는 호락호락한 동네가 아니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낮이건 밤이건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에서 꾸준히 성과를 내는 일이 만만치 않다. 미국은 고용 계약이 자유로운 까닭에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개인이나 팀은 가차 없이 정리된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 시민이나 영주권자가 아니라면 바로 미국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
상당한 수준의 급여를 받더라도 집값을 비롯한 물가가 너무 비싼 탓에 다른 지역에 비해 여유 있게 살기는 힘들다. 실리콘밸리에서 소위 억대 연봉을 받더라도 연방세와 캘리포니아 주세를 내고, 월세를 내고 나면 빠듯한 생활비가 남는다. 물가를 떠나서 교통, 학교, 여가시설 등 모든 사회 인프라가 부족한 상황이다. 나의 경우 아이를 맡길 보육원을 구하기 위해 수십 군데 연락을 해서 겨우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사람이 몰리는 지역은 어디나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동종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 교류할 수 있는 테크 관련된 대규모 컨퍼런스 및 소규모 이벤트가 끊임없이 열린다. 일 외의 자기계발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 첫아이가 작년에 나오면서 업무시간 이외에 모임을 갖기가 쉽지 않아졌고, 반면에 아이가 뛰어놀 공간이 있는 집과 보육원을 구하는데 많은 노력을 쏟아야 했다. 반대로 회사 밖의 모임에 참석하기는 쉽지 않았다. 반면에 가족이 없어 시간 활용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훨씬 다양한 모임에 참석하거나, 개인적인 프로젝트에 시간을 더 쏟을 수 있을 것이다.
실리콘 밸리로 가는 길
실리콘밸리에 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선택은 아니다.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나은 조건의 직장을 구할 수 있거나, 혹은 스타트업에 취직하거나 창업을 위한 팀을 꾸리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선택일 수 있지만 대기업에서 적당히 일하면서 삶을 즐기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실리콘밸리에서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 지나치게 클 수도 있다. 또한, 한국에서 바로 미국에 취업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비자 문제로 스타트업에 조인하는 것이 쉽지 않을수록 있다.
게다가 많은 테크 회사들이 자사의 기술을 오픈소스 및 논문 형태로 공개하는 등 기술의 확산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추세로 말미암아 실리콘밸리에서 만들어진 기술이라도 거의 실시간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또한 딥러닝이나 블록체인 등 많은 분야에서 한국에도 실리콘밸리만큼이나 활발한 온라인 및 오프라인 커뮤니티가 존재한다. 굳이 실리콘밸리에, 혹은 미국에 있지 않더라도 첨단 기술을 접하는데 큰 지장이 없는 것이다. 막연히 ‘실리콘밸리에 오면 뭔가 되겠지’라는 식의 접근은 점점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막연한 환상으로 미국, 특히 실리콘밸리로의 이주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시 한번 고민해보고 실증적인 해답을 얻기 위해 관련 커뮤니티나 서적 등 자료도 찾아보자. 실리콘밸리는 과연 내가 하려는 일과 삶을 위한 최선의 환경인가? 내가 현재 처한 환경에서 이런 가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실제로 이주하기 전에 이를 검증해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주를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과 대가는 무엇인가?
객원 저자 김진영
컴퓨터 사이언스 (정보 검색) 전공으로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의 빙(Bing) 검색엔진 부문의 연구자로 일했다. 회사에서 검색 품질을 평가하는 일을 담당하며, 사내에서 신입사원을 상대로 업무에서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 과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2017년부터는 스냅(Snap Inc)의 데이터 과학자로 일하고 있다.(http://www.hellodatascience.com/?page_id=25)
그림: Chili. 디자이너. 생각을 그림으로 요약하는데 관심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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