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글(ringle) 이승훈 대표가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2016년 7월 10일, MBA 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 남겼던 노트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열흘 남았다. 자연스레 내 인생을 한 번 뒤돌아본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항상 강한 상대가 나타났다. 나는 그 상대를 한 번도 한 방에 무찌른 적이 없다. 신나게 얻어 터지다가 막판에 겨우 이겨냈다. 평화가 찾아올 만 하면 더 강한 상대가 나타났다. 다시 신나게 맞다가 막판에 이겨냈다. 그 과정이 반복되었다. “한 번 쯤 약한 상대가 나타나 독자가 편하게 감상하게 해주면 안되나?”라는 안타까운 바램으로 읽던 만화책 속 법칙은, 내 인생에 똑같이 적용되었다.
1막: 전주에서 서울까지 (초, 중, 고, 그리고 대학교 입학)
나는 전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그 시절, 지방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나에겐 컴플렉스였다. 방학마다 서울 이모 집에 놀러갔는데, 그곳에서 만난 서울/경기권의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팔방미인 같았다. 공부도 잘하고, 좋은 학원도 다니고, PC 통신에 글도 쓰고, 외국도 나갔다 오고, 키도 크고.. 학교도 전주 대비 선진화되어있고… 나는 그들 대비 무색무취하고, 경쟁력 낮은 학생같았다. 그래서, 대학만큼은 서울에 있는 가장 좋은 곳에 가고 싶었다. 이를 위해, 전주에서 붙잡을 수 있는 건 교과서와 문제집, 그리고 모의고사 시험 뿐이었다.
그렇다고, 노력한 만큼 모의고사 점수가 잘 나오지는 않았다. 모의고사의 경우, 머리좋은 학생이 노력하는 학생보다 점수가 잘 나오는 구조였는데, 나는 머리가 좋지는 않았다. 생활지도부에도 “머리 좋다” 라는 말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엄청나게 성실하다” 라는 표현만 가득했었다. 개미형 학생이었던 나는, 배짱이 & 천재형 친구들이 부러웠다.
수능을 보았고, 운 좋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했다. 그런데 입학해도 내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경영대가 가고 싶었다.이유는 커트라인이 더 높고 인기학과였기 때문이었다. 가장 입학하기 어렵다는 곳에 가서 우월함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들 대학 1학년을 즐길 때, 전과 준비를 위해 고등학교 이상으로 공부하였다. 그렇게 2년을 공부를 한 후에 경영대로 전과를 했다.
2막: 더 높은 곳을 향한 쉼 없는, 끝없는 투쟁 (대학교~취업)
그런데, 경영대로 전과를 해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는 외국계 회사 (예: 컨설팅, 투자은행)에서 대학생 인턴 선발을 늘려가던 시기였다. 이 곳에서 인턴을 했다는 것은 “나는 좀 달라”를 상징하는 뱃지 같았다. 나는 그 뱃지가 달고 싶었다. 그래서 온갖 회사에 다 지원했지만 (Bain, BCG, Monitor, AT Kearney, KPMG, Deloitte, Accenture, ABN AMRO, Leman Brothers) 모조리 떨어졌다. 그리고, 그 당시 또 다른 필수코스였던 경영대 동아리에 지원했지만, 역시나 다 떨어졌다. (SMIC, MCSA 다 떨어졌다)
객관적으로 나보다 준비된 친구들이 많았다. 대학 입학 전부터 영어를 어느 정도 마스터하고, 내가 전과를 준비하던 1학년 시절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인턴을 이미 하나 정도 마친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포기하는 법은 잘 몰라서 계속 지원했다. 결국, 당시 대학생 인턴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해 어떻게 인턴을 뽑는건지 잘 몰랐던 KT 마케팅 팀 인턴으로 들어갔고, 신생 연합 경영 동아리 S&D에도 합격하게 되었다. KT 면접에서 “뽑아만 주시면 시키는 것 다 하고 진짜 열심히 하겠다”라고 이야기 했던 기억이, S&D 면접에서 “제 시간을 평생 바치겠습니다” 라고 말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 땐 열심히 하겠다는 말 밖에 내세울 것이 없었다.
인턴을 마치고, 동아리에 입회했지만, 역시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수능 영어”에 우쭐하고 살았던 내가 처음으로 실전 영어의 장벽과 마주한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동아리 세션은 1주일에 1회, 6시간 동안 하버드 비즈니스 케이스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고 피드백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6시간 세션 중 3시간은 영어로만 진행되었는데, 외고를 나온 형들과 외국에서 살다 온 누나 사이에서 나는 정말 꿀먹은 벙어리였다.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분노의 눈물을 흘린적도 있었다.
영어는 열심히 한다고 단시간에 정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였다. 결국, 영어 세션은 포기하고 일주일 노력해서 잘할 수 있는 길인 “한국말 세션에서 잘하기”를 선택했다. 독하게 business case를 연구하고 분석자료를 치밀하게 준비해서, 물량으로 토론을 압살하려는 노력을 반복했다. 영어 세션에선 벙어리였지만 한글 세션에서 한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4년 간 동아리를 했다. 그리고 취업 시즌이 다가왔다. 나는 당시 가장 입사하기 어렵고, 소수만 뽑고, 뭔가 있어 보였던 골드만삭스 IBD에 취업하고 싶었다. 그래서 IBD 인턴을 중간중간 지원했지만, 영어 때문에 모두 떨어졌었다. IBD는 영어가 native 급이어야 하는데, 내 영어는 전주에서 50대 이상의 선생님들께 배운 것이 전부였고 이 마저도 대학 입학 후 놓아버렸었다. 그래서, 당시 외국계 투자은행 IBD 만큼 명성이 있으면서도, 영어 인터뷰를 진행하지 않았던 전략 컨설팅 회사에 지원해 운좋게 입사하게 되었다.
그렇게 BCG라는 좋은 회사에 입사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평가를 받았는데, 나는 1점(최고 등급)이 너무 받고 싶었다. “나는 좀 달라” 를 상징하는 뱃지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1점을 받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특히, 해외 전문가 인터뷰를 영어로 많이 했어야 했는데, 나는 영어로 하는 인터뷰는 정말 젬병이었다.
영어로 물어보는 것도, 영어를 알아듣고 정리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서 찾은 나만의 생존법은 “인터뷰 전에 질문할 주제에 대해 찾아보고 연구하고 상상해서, 답을 90% 정해놓고 인터뷰이에게 확인만 받자”였다.
다른 친구들은 인터뷰이에게 질문하고 답변을 받아서 정리할 때, 나는 구글링으로 관련 기사/ 자료를 연구하고, 상상해보고, CEO 인터뷰 클립을 찾아서 돌려보며, 영어가 부족한 부분을 메꿨다. 그리고, 최대한 영어 프로젝트를 피하고 정보력/추론력/ 상상력이 중요한 케이스에서 악착같이 버티고 버텼다.
그렇게 3~4년을 버티다 이력서에 또 다른 뱃지를 달기 위해 MBA를 준비했다. 실은 HBS에 가고 싶었다. 당시 1등 학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비가 부족해 첫 번째 MBA 도전 시엔 HBS, Stanford는 지원하지 못했고 토플 커트라인이 낮은 학교들에 지원했었다. 컨설팅 메리트를 받으며 MBA 서류를 통과하고 인터뷰까지 무난하게 갔지만, 인터뷰에서 대패했다.
MBA 인터뷰는 100% 영어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토플 점수도 낮고 영어로 인터뷰 해야 하는 상황에 완전히 주눅 들어서, 4개 학교 중 4개 학교 모두에서 인터뷰 후 불합격 통보를 받아야 했다.
3막 1장: 나를 바꾼 질문. “What matters most to you and why?”
그런데, 두 번째 MBA 준비 과정에서 나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스탠포드에 이상하게 마음이 갔다. 이유는 스탠포드 MBA의 명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Essay 1번 “What matters most to you”라는 질문에서 마음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인기있는 직장을 찾아 다니는 인생 보다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삶을 찾아보라.”라는 의도로 던져진 이 질문에 나는 이상하게 끌렸다. 그래서 나머지 5개 학교에는 신경 쓰지 못하고 스탠포드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스탠포드 역시 인터뷰 후 아쉽게 떨어졌다. 영어 인터뷰 장벽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다른 학교들 역시 준비를 전혀 못해서인지 인터뷰에서 떨어졌다.
솔직히 조금 쪽팔렸다. 남들은 한 번에 가는 MBA에, 2년 연속 도전해서 실패한 것이 민망했다. BCG 형, 누나들이 “쟤 이제 어떻게 하냐..ㅠ.ㅠ”라며 진심으로 걱정해주는데, 동정을 받는 것 같아 엄청 쪽팔렸던 기억이 난다. 후배들에겐 진짜 면목이 없었다.
그런데도 스탠포드 MBA는 꼭 가고 싶었다. 스탠포드 Essay에 담았던 인생을 진짜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인생을 살기 위한 시작점인 스탠포드 MBA에 꼭 가고 싶었다. 물론 스탠포드 MBA라는 타이틀에도 욕심도 있었다. 그래서, 엄청난 쪽팔림을 무릅쓰고 MBA 삼수, 스탠포드 재수에 도전하게 됐다.
스탠포드 재지원 essay는 어렵지 않았다. “저는 작년 Essay에 작성한 삶을 진짜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진심입니다. 하지만, 그 삶을 살기 위해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그래서 스탠포드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기적적으로 인터뷰 인비테이션을 다시 받았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영어로 말하기 위한 최대한의 준비를 했다. 내 진심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영어로 바꿔보고, back-up 자료도 제작하며 준비를 했다.
막상 인터뷰에 들어가니 머리가 다시 하얘졌다. 준비한 멘트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내 마음 속에 분명히 있었다.쪽팔렸지만, 부족한 영어로 더듬더듬 최선을 다해 이야기 해나갔다. 얼마나 엉망인 영어로 이야기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끝까지 이야기 했다. 그 인터뷰가, 내 인생 최초의 “후회가 남지 않는 영어 인터뷰” 였다. 하늘에 결과를 맡겼다. 그리고 운 좋게 합격했다.
3막 2장: 더 넓은 세상과 소통의 시작
그렇게 스탠포드에 입학했지만, 여전히, 이제는 당.연.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우선 MBA 동기 400명 중 영어 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친구는 5~10명 내외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곳은 수업 참여가 너무나 중요한 곳이었다. 수업은 보통 1시간 45분 진행되는데, 60명 정원의 수업에서 모두가 한 마디씩 참여하고, 교수님이 지휘자처럼 정리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참여가 극도로 저조한 학생은 LP(Low Pass, 한국으로 말하자면 C-)를 받게 되는데, LP 를 받은 과목이 20~30% 정도 되면 퇴학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빠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세상을 바꾸는 꿈이고 나발이고, 일단 이 곳에서 살아 남기 위해 수업 당 2~3마디 하려고 하루에 14시간씩 준비했다. 첫 번째 쿼터 때(스탠포드 MBA는 학기제가 아닌 쿼터제로 운영되며, 4학기 졸업이 아닌 6개 쿼터제로 구성되어 있음) 하루에 수업이 3~4개 있었는데, 수업 당 3~4시간 씩 사전 준비를 해갔다. 수업 당 할 말을 10마디 정도 적어서 외워갔는데(랩퍼의 마음으로 10마디 씩 적었다), 수업 전개가 너무 빠르고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한 마디도 못하고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첫 번째 쿼터 수업 중 6명이서 듣는 Leadership Lap이라는 수업에서 친구들이 어느 날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친구들: “6명이서 진행하는 수업에서 듣는 네 생각이 참 좋고, 네 진심은 유독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 그런데 왜 60명 수업에서는 말을 잘 안하니?”
나: “59명에게 피해를 안 주려면 잘 해야 하는데, 나는 잘 하려면 준비가 완벽해야 해. 준비가 완벽하지 않으면 말을 못하겠어.”
친구들: “그러면 수업에서 잘한다는 것의 의미가 뭐야?”
나. “음….”
친구들: “59명의 친구들은, 잘 이야기 하는 것 보단 네가 어떤 사람이고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듣고 싶어 해. 너에게 잘 해야한다고 압박을 주는 사람은 너 혼자밖에 없어. 다른 친구들은 네가 영어를 완벽히 구사하고 정답을 이야기 하는 것 보단, 네 생각을 궁금해 해. 네 소신과 경험을 이야기 하는데, 거기에 잘하고 못하고가 있을까? 정답과 오답이 있을까?”
나: “흠…. ㅠ.ㅠ”
친구들: “6명 수업 시에는 네가 준비 없이도 이야기 하는 거 같은데, 우리는 그 이야기가 참 좋아. 60명 수업에서도 지금처럼만 해 봐. 우리는 너에 대한 책임감이 있으니, 다음 수업에서 이야기 안 하고 있으면 문자라도 보내서 압박할 거야.”
이 친구들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용기를 내서, 수업 당 1~2마디를 어떻게든 했다. 1~2마디를 하다 보니 내가 하는 말에 대한 책임감이 더 생겼다. 기존에는 “LP 받지 않기 위해!” 이야기 했다면, 수업 참여가 조금 늘어난 시점 부터는 “친구들에게 내 생각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 때가 “남들보다 잘 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시점이었다. 나는 여기서 남들보다 잘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곳은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그닥 중요하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곳이었다.
힘겨웠던 1쿼터가 끝나갈 무렵, 내 동기 성파가 재밌는 자극을 던졌다.
“형, 스탠포드 학부 생들을 튜터로 해서,
한국에 영어 서비스를 만들어 보지 않을래?”
4막 1장: 사업, 새로운 도전
처음엔 “이 녀석 스타트업 병 도졌나?” 싶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영어 서비스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에 마음이 갔다. 성파가 이 서비스를 떠올리게 된 계기에도 공감이 갔고, 영어를 피하며 살아온 내 과거도 생각났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영어를 피해 다른 필살기를 연마하며 버텨온 인생이었다. 사실 피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영어를 연습하기 위한 시도를 꽤 많이 했지만, 나에게 맞는 영어교육을 찾지 못했다. 어렸을 적엔 전주에 좋은 학원이 많지 않았고, 서울에 있을 땐 비즈니스 토픽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더 이상 영어를 피해서 사는 것도 싫었고, 또 막상 여기까지 왔는데 다양한 국가에서 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보고도 싶었다. 그 친구들에게 내 생각을 전해주고 싶기도 했다. 이젠 영어를 피하고 안 피하고의 개념에서 벗어나, 이 곳에 모인 다양한 친구들을 더 깊이 알아가고, 함께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영어가 꼭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내 영어를 마스터하기 위해, 그리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영어공부를 돕기 위해, 링글을 시작하게 됐다.
링글을 시작하며,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마주했다. 처음엔 스탠포드 학생들과 시작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하버드 튜터들과 함께하게 됐는데, 이 친구들과 계속 대화를 하다보니 이 친구들에게서 나와 유사한 고뇌와 꿈,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미래의 글로벌 리더로서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이들에겐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을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은 순수한 열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 친구들은 서울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환경과 기회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더 나은 세계 구현에 대한 사명감을 느끼며, 엄청나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친구들의 구글 캘린더를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30분 단위로 엄청 많은 일정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왠만한 직장인들보다 더 바쁜 일정표였다. 이렇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사는 와중에 링글 수업을 책임감 있게 리드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학자금을 충당해 나가는 이 친구들이 대단하면서도 고맙게 느껴졌다.
이 친구들은 나와 나이 차가 10살은 넘게 났지만, 꿈과 고민이 비슷해서인지 대화가 잘 통했고 마음은 더 잘 통했다. 특히, 스타트업을 주제로 한 세션(How to start/Grow a start-up)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왜 링글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설명 해줬는데, 갑자기 한 친구가 눈물을 글썽였던 기억이 난다.
본인도 본인의 길을 어떻게 개척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좋은 이야기를 공유해줘서 고맙다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이 친구들이 성장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의 링글을 만들어야 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동시에, 이 친구들이라면 한국에 있는 많은 분들의 “함께 성장 파트너”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4막 2장: Connecting the dots.
MBA 2년간 학업과 사업을 병행하며 정신없이 달렸다. 그리고, 2주 전 MBA 졸업을 하고, 이제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회했다고 생각했던 지점들이 내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먼저, 전주에서의 삶이 이 곳 스탠포드/팔로알토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City Life가 부족한 이 곳 팔로알토는 나에겐 고향처럼 너무 편했다. 이 곳에서의 2년은 너무 행복했다.
사회복지학과 입학은, 세상을 돈이 아닌 사람과 삶으로 생각하는 법을 알려줬다.
BCG는 나에게 다양한 산업에 대한 인사이트와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 하는 법을 알려주었고, 덕분에 링글 교재를 재밌게 쓰고 있다.
MBA 삼수와 스탠포드 재수는, 나에게 why MBA 와 why Stanford를 2년 이상 고민하게 만들어줬고, 사업 동반자도 만나게 해줬다.
그리고, 비록 어렸을 적 영어권 국가에 살지 못해 영어를 컴플렉스로 느끼며 살아왔지만, 덕분에 나와 유사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를 개발하는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이렇게 과거의 일들이 이어져 있음이 신기하다. 그 선은 직선이 아닌 굴곡이 많은 선이지만, 그 굴곡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아 참 다행이다.
다시금 어마무시한 상대가 내 앞에 보인다. 그런데 이 상대는 과거의 상대와는 다르다. 이미 사업기반을 갖춘 멋진 직장에 들어가 비즈니스를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 아닌, 고객이 0명인 밑바닥부터 시작해 나가는 일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 그 안에서 승진하기 위한 또 다른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척박한 환경에서 팀과 머리를 맞대 우리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싸움을 해야하는 것도 다르다.
다행히, 스탠포드/실리콘밸리에서의 2년은, 검소한 삶을 살게 해줬고 세상의 성공 기준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줬다. 그리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삶을 구현해 나가는 삶 자체를 즐기게 해줬다.
그리고, 이 곳에 와서 알게 되었다. 세상은 넓다. 그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살고 있다. 그런 세상들이 서로 연결되어 유기적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넓은 세상과 소통하며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앞으로 우리 인생에서 더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내가 MBA 동기들과 우리 튜터들을 몰랐더라면…. 내 삶은 부유했을 수는 있지만 뜻 깊은 추억으로 채워지진 못 헀을 것 같다.
내가, 그리고 우리 팀이, 한국과 아시아 사람들에게 더 넓은 세상과 통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길 희망한다. 그렇게 세상을 의미있게 바꾸는 서비스가 되길 소망한다. 큰 꿈을 품고, 새로운 서비스를 안고, 다른 사람이 되어, 사랑하는 고국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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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탠포드 MBA/실리콘밸리에 살면서 느낌 차별점
(2) 창업, 100개 팀 중 1개 팀이 성공한다는 말의 의미
(1) 제조업과 IT 서비스업의 본질적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