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지도사 최재현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오후 시간대에 카페를 찾아보면 노트북과 씨름하고 있는 많은 젊은 친구들을 보게 된다. 공부를 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이름 모를 PPT 작업이나 문서를 펼쳐 놓고, 앞에 있는 사람과 활발하게 논의하고 토의하고 있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예전에 블로그를 한창 사용할 때 글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카페를 찾아 글을 쓰곤 했다. 자주 가는 스타벅스에 노트북을 놓을 수 있는 넓은 테이블이 2~3개가 있다 보니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스타벅스를 찾아 넓은 자리에 노트북을 펴고 창업에 관련된 글을 남기고 있었다.
잠시 뒤, 내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젊은 친구들은 노트북을 펴고 문서를 보면서 조용하지만 활발하게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한 친구는 대표자로 보였고 한 친구는 팀원이었던 것 같았는데 귀동냥으로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 듯 보였다.
팀원: ‘나는 좀 섭섭해요. 대표님’
대표: ‘어떤 부분이 섭섭한데?’
팀원: ‘사실 지난번 계약 건도 제가 자료 준비 다 하고 계약서도 준비하고..
컨텍부터 갖은 노력을 다했잖아요.’
대표: ‘그래서?’
팀원: ‘그런데 계약 성사되고 나서 대표님께서는 저한테 잘했다,
고생했다 말 한마디 없으셨잖아요?’
대표: ‘물론 고생했지. 그런데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결정을 누가 한 거니? 그리고 문서가 뭐 별거니?’
팀원: ‘결정은 대표님이 하셨죠. 하지만 대표님이 무리한 요구하실 때마다
사무실에서 고생한 저는요?’
대표: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해서 문서 만든 거 가지고 뭐 그리 유세니?’
팀원: ‘다운로드해서 문서 만드는 게 쉬운 줄 아세요?’
격앙되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 분명 좋은 결과를 두고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 대화였다. 대표자가 하는 말도 이해가 되고 함께 일하고 있는 친구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지만 사실 나는 스타트업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창업 초기 기업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표자의 말보다 함께 일하고 있는 친구의 마음이 조금 더 이해가 되었다.
특히 여러 대화 중에서 내 귀에 담기는 문장이 두 가지가 있었다.
“
문서 만드는 게 쉬운 줄 아세요?
사무실에서 하는 일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죠?
“
최근에 자문하게 된 어떤 창업기업은 대표자가 현장만 강조하는 분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제품에만 몰두해온 대표님이었는데 자기가 만든 제품이 조금 더 좋은 제품이 되도록 연구하고 개선하는 데만 굉장히 투자하는 분이었다.
조금 더 좋은 재료, 조금 더 좋은 성능, 조금 더 좋은 품질을 갖추는 데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대표님은 ‘페이퍼 워크’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혀 신경 쓰지도, 신경 쓰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사무일을 보는 친구들을 왜 비싼 연봉을 주고 쓰는지 전혀 이해를 못 하시는 분이었다.
자문을 시작하면서 대표자는 나에게 자문이 아닌 ‘페이퍼 워크’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자문과 컨설팅의 경계선이 모호하긴 하지만 대표님이 요구한 것은 자문의 영역은 아니었다. 회사소개서를 만들고, 사업계획서를 만들고 각종 계약서도 만들고 무슨 서류, 무슨 서류를 잔뜩 만들어 달라고 했다.
심지어는 시장조사를 한 뒤에 분석 결과를 데이터로 보고해달라 했고 결과를 토대로 단계적인 마케팅 계획, 전략을 제시해 달라고 했다. 요구사항이 많아서, 요구사항이 자문이 아니어서 대표님의 말씀에 당황한 것이 아니라 대표님이 생각하는 구조가 너무 잘못되어서 당황스러웠다.
문서 만드는 것은 전문가가 있으니까,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지.
회사소개서도 돈 주니까 뚝딱 만들어 주던데?
우리 서로 잘하는 걸 합시다. 나는 제품을 잘 만들고 최대표는 서류를 만들고.
사무직이 연봉을 많이 달라는데 왜 그래야 하지?
사무실에 편하게 앉아서 일하는 게 뭐 대수라고.
제품만 좋으면 다 되는 거 아니야?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다양하고 다이내믹하다. 드라마에서 비추는 사무실의 모습보다 우리가 예상하고 예측 가능한 범위의 수준보다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늘 우리의 상상의 곡선을 넘어간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 아니라 ‘XX놈 보존의 법칙’이 있다고 할 정도로 사무실은 말도 안 되는 업무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 넘쳐나고 기초적인 비즈니스 예절이나 상식이 없는 일꾼들로 넘쳐난다.
품질이 우수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은 창업기업, 스타트업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대표자들은 창업 초기일수록 양질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한다. 우수한 품질이 먼저 보장되어야 후속작업으로 마케팅이나 다른 영업 활동이 잘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우수한 품질이 고객의 선택을 받고 곧 ‘만족스러운 후기->재구매->입소문->성장’으로 이어진다는 판에 박힌 생각 때문에 대표자들은 제품이 만들어지게 되는 ‘현장’만을 강조하게 되는데 대표자는 그 현장이 사무실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팀원과 어긋난 이해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
사무실에서 일하면 마냥 편한 것처럼 보이시나요?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으신가요?
“
우수한 제품을 매력적인 언어로 홈페이지에 구현하는 것, 팝업 공지, 배너에 들어가는 문구를 기획하는 것. 기획한 내용을 토대로 디자인을 이쁘게 만들고 이를 SNS로 홍보하는 일. B2B 영업을 위해 회사 소개를 압축하여 몇 장 내로 요약하는 일, 고객에게 MMS를 보내기 위해 문구를 가다듬고 오탈자를 잡는 일, CS 응대를 위해 전화응대 매뉴얼을 만들고, 택배 배송 시 들어가는 전단지 문구를 요약하는 것 등
이 외에도 모든 순간순간을 채우는 사무실에서의 업무는 기업이 운영되는 매우 기초적이며 중요한 업무들이다. 소위 페이퍼 워크라고 불리는 사무실에서의 업무는 없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잘’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수행되어야 하는 중요한 일에 속한다. 대표자들은 이러한 일이 매우 쉬운 일이며, 사무실에서 이런 서류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마냥 편하게 일한다고만 생각한다.
오랜 시간 관계를 맺어온 창업기업이 있었다. 좋은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억대가 넘어가는 개발자금을 대표자가 몇 년에 걸쳐 투자를 감행했다. 투자의 결과물로 성능과 효과가 매우 좋은 제품이 나왔는데 문제는 이렇게 좋은 제품을 어떻게 마케팅하고 홍보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을 전혀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자금 상황이 허락되는 한도 내에서 사무직을 3명 채용했다. 경리업무를 볼 친구, 마케팅과 홍보를 담당할 친구, 대표자를 도와 물류 업무를 볼 친구. 대표자는 신입으로 사무직을 구성했으며 자신이 생각하고 염두에 두고 있는 계획과 방향을 사무직에게 설파하기 시작했다.
대표자와 연락이 닿은 것은 사무직이 채용된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표자가 나를 부른 것은 사무직들이 무능력하니까 일을 좀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대표자와 대화를 마무리하고 사무일을 보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무직들 모두 대표자에 대한 불만이 한가득이었다.
‘자기는 전혀 할 줄 모르면서, 우리한테는 쉬울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너무 싫습니다.’
‘저는 웹디자이너로 채용된 것인데 기획까지 업무를 맡기세요.’
‘시키는 대로 문서를 만들어 갔더니 바꾸라고 하더군요. 바꾸어서 다시 갔더니 원래 것이 좋다고…’
‘고객한테 mms를 발송하는데 문구를 저보고 작성하라고 했어요. 작성했더니 화부터 내셨어요.’
‘일을 가르치는 사수가 없는 상황에서 뭐든지 시키기만 하면 뚝딱 만들어지는 줄 아세요.’
‘SNS 마케팅 보고서를 올리라고 했어요. 저는 경리업무를 보고 있는데 말이죠.’사무직들의 불만을 듣다 보니 가감할 것 없이 말 하나하나 사무업무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었다. 대표자는 자기가 계획을 세우고 말만 하면 문서가 뚝딱하고 나오는 도깨비방망이가 사무직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무 업무의 디테일한 고뇌와 고민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자기의 생각과 방향대로 지시만 하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의 뜻대로 업무가 돌아가지 않으니 무능하다고 사무직을 치부했던 것인데 막상 사무직을 만나보니 모두가 유능한 가운데 대표자가 페이퍼 워크 쪽으로 무능한 것으로 보여 씁쓸했다.
일당백, 원맨쇼를 해야 하는 스타트업일수록 대표자가 페이퍼 워크에 무딜 경우 반드시 잡음이 발생한다. 물론 대표자가 모든 업무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업무가 매우 중요하며, 최소한의 문서 업무에 대한 프로세스, 업무 상식이나 예절 정도는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도깨비방망이처럼 지시하고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서류라고 생각하지 말고, 기획하고 문구를 다듬는 것을 마치 시제품의 부품이나 기능을 개선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별별 창업 이야기] 이전 글
(2) 나는 아니겠지, 나는 아닐 거야
(1) 스타트업이 실패하는 지름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