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를 그리다 팀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
[“갑”이 없는 조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글 이후 만들어진 페이스북, 트위터, 넷플릭스 등이 지향하는 실리콘밸리의 조직은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결정권을 갖고 각자의 역할에서 전문성을 발휘하여 목표를 이루어 나간다. 이를 Role-driven 조직이라고 이름 붙였다. 반면 지도자가 모든 결정권을 갖고 아랫사람들이 시키는 일을 일사불란하게 해 내는 조직을 Rank-driven 조직이라고 명명하였다.
전문성을 갖고 결정을 잘 내리는 사람과 시키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정말 많이 다르다.
각 경우에 회사가 원하는 최고의 인재는 어떤 사람일까?
#성실하고 눈치 빠른 인재 Aaron
Aaron은 Rank-driven 조직에 적합한 최고의 개발자이다. 그는 명문 대학의 컴퓨터공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토익 성적이 980점에 달하며 대기업 입사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하였다. 그는 구글에서 만든 딥러닝을 위한 오픈소스 프로젝트 텐서 플로우를 이용하여 다양한 어플리케이션을 구현하곤 해서 AI 영역에도 많은 경험이 있었다. 입사 후에도 보고서와 기획서를 쓰는 능력과 업무 처리 능력은 물론 다른 직원들과의 관계까지 좋아서 고속 승진이 예정된 직원이었다. 팀장님은 늘 그를 믿는다. 그리고 다른 직원들에게도 모범적인 직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어느 날 팀장님이 Aaron을 불러 AI를 이용하여 시나리오별 영업 실적을 예측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위에서 내려온 기획서를 건네주었다. 200장에 달하는 기획서에는 정확한 표준화 프로세스가 구현되어 있었다. 필요한 기능들의 목록이 정확하게 나와 있고 어떠한 UX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 자세히 쓰여 있었다. 팀장님은 2개월의 시간을 주겠다고 말했다. Aaron은 자신 있게 말했다.
“5주 만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팀장님은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너무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하라고 흐뭇하게 이야기했다.
Aaron은 기획서에 적혀 있는 대로 자바에 텐서 플로우를 돌려서 모델을 만들고 AI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5주 만에 그것을 해 내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야근도 불사하며 5주만에 그 일을 해 낸 그의 프로그램은 소소한 버그를 제외하면 완벽하게 기획서의 기능을 다 구현하였다.
남들은 2개월이 걸려도 못 할 일을 5주 만에 해낸 그는 뿌듯해하면서도 겸손한 표정으로 팀장님께 프로그램을 보여드렸다. 팀장님은 벌써부터 사장님께 이 프로그램을 보여줄 생각에 들떠있었다. 팀장님은 정말 이 친구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창의적이고 소통하는 인재 Bryan
Bryan은 Role-driven 조직에 적합한 최고의 인재이다. 그는 학부 때 언론학을 전공하면서 Computer Science를 부전공으로 하였다. 석사 때에는 AI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며 Computer Science를 전공하였다. 석사 때부터 그의 연구는 벌써 업계와 학계에 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했고 링크드인을 통해 각 회사의 리쿠르터들이 연락을 해왔다. 박사도 생각했었지만 리쿠르터들의 집요한 구애와 각 회사 엔지니어링 매니저들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석사를 끝내고 그는 실리콘밸리 기업에 면접을 보기로 하였다.
구글에서는 6명 면접관 전원 합격, 페이스북에서는 4명 면접관 전원 합격, 그 외에도 에어비앤비와 우버에 합격하였다. 각 회사가 2억원 정도에 해당하는 연봉과 4년간 4억원 정도에 해당하는 주식을 약속하였다. 4년 후를 생각하면 주식이 안정적인 구글이나 페이스북보다는 상장을 앞두고 있어 주식의 가치가 높아질 에어비앤비와 우버가 훨씬 더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구글의 주식은 4년 후에 잘 되면 3-4배까지 뛸 수 있지만 에어비앤비의 주식은 주식 상장(IPO)이 잘 되면 10배가 될 수도 20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상장을 못 할 수도 있고 심지어 회사가 망해 버릴 수도 있는 비상장 스타트업 (Pre-IPO Start-up)에 가는 것은 좀 리스크가 있지만, 에어비앤비나 우버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는 최종적으로 에어비앤비를 선택하였다.
에어비앤비 AI 팀에 입사한 그는 매니저와 1:1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니저는 그 자리에서 앞으로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로 AI를 이용해 앞으로의 시나리오별 수익을 예측하는 프로젝트를 이야기하며 관심이 있냐고 물었다. 자신의 전공 영역과도 일치해서 Bryan은 흔쾌히 그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Bryan은 프로덕트 매니저(PM)와 만나 요구 사항(Requirements)을 들었다. PM은 많은 요구사항을 가지고 있었고 좋은 아이디어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Bryan은 PM의 요구사항을 토대로 Google Docs에다 2장짜리 디자인 다큐먼트(Design Document)를 만들었다. 줄여서 디자인 독(Design Doc)이라고 하는 이 문서에는 왜 이 프로젝트가 필요한지를 간단히 쓰고 PM이 이야기했던 요구사항들을 썼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를 썼다. 그는 여러 머신러닝 기법들을 비교하며 장단점을 기술하였고 최종적으로 딥러닝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Google Docs의 공유(Share) 기능을 이용 팀원들에게 문서를 보냈다.
팀원들은 그의 Design Doc에 다양한 코멘트를 남겼다. 어떤 엔지니어는 딥러닝이면 다 된다고 믿는 요즘의 머신러닝계를 비판하면서 간단한 Logistic Regression을 이용해서도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뭐 일리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매니저는 디자인 독을 한 줄 한 줄 뜯어보면서 오타를 고쳐주기도 하고 지난 프로젝트와의 연속성과 에어비앤비가 지원하는 머신러닝 기술들을 다 나열해주었다.
프로덕트 매니저는 디자이너들과 만나 디자인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그 디자인을 Bryan에게 보내 review를 요청하였다. Bryan은 엔지니어링 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지적하였다. Bryan의 의견 중 반 정도는 디자이너들이 반영해서 고쳐주었고, 나머지 반 정도는 Bryan이 양보하기로 했다.
다양한 논의 끝에 Design Doc이 Sign Off 되었다. 즉, 모든 사람들이 텐서 플로우를 이용한 방식이 좋다고 동의해 주었다.
Bryan은 텐서 플로우를 이용한 방식으로 구현하였다. 다른 여러 알고리즘을 비교해봤지만 그게 제일 나은 것 같았다. 그는 집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야근을 하기도 하면서 팀원들과 함께 6주 정도에 일을 끝마쳤다. 매니저에게 프로젝트 이야기를 들은 지 2개월 정도 되는 때였다. 매니저와 팀원들은 프로젝트 론칭을 축하하며 하이파이브를 하며 회사에서 케이크를 자르고 샴페인을 마셨다.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에 온 Aaron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던 개발자 Aaron도 에어비앤비 리쿠르터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워낙에 쌓인 개발 능력으로 쉽게 면접을 통과하였다. 문화 적합성(Cultural Fit) 면접에서는 낯선 질문 탓에 좀 고전했지만 최종적으로 입사에 성공하였다.
매니저는 그에게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이야기하며 어떤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냐고 물었다. Aaron은 이전 회사에서 하던 AI를 이용한 수익 예측 프로젝트를 선택하였다. 이 회사는 진짜 여유로웠다. 일을 주지도 않고 출퇴근 시간도 없었다. 한 이틀 멍 때리고 보내다가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Aaron은 “프로젝트 언제 시작해?”라고 물었다. 매니저는 조금 당황하면서 “네가 준비되면 언제든지”라고 대답하였다. Aaron은 “그럼 오늘부터라도 당장 시작할 수 있어”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 매니저는 “오, 좋아 당장 시작하자!”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또 며칠이 지나도 일을 주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매니저를 찾아갔더니 PM과의 미팅을 주선해 주었다. PM은 그에게 기획서는커녕 말로 이러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요구사항들과 두루뭉술한 아이디어들을 말해주었다. Aaron은 더 자세한 스펙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PM은 아직 정확한 스펙은 없고 같이 아이디어를 만들어 보자고 하였다. Aaron은 워낙 익숙한 프로젝트인지라 그 정도만 들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기획서도 제대로 안 쓰는 이 회사가 정말 개판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 옛날 회사에서 쓰던 기술을 총동원해서 멋진 AI 프로젝트를 완성하였다. PM, 동료 엔지니어, 매니저 모두 다 깜짝 놀라는 분위기였다. Aaron은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한 작품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각종 비판이 쏟아졌다. PM은 자신이 생각했던 기능들이 빠졌다고 했다. 자기가 기획서도 안 써놓고 말이 많다. 다른 엔지니어들은 왜 텐서 플로우를 썼냐느니 그게 가장 좋은 기술이냐느니 말이 많다. Aaron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이게 최적의 기술이고 이미 많은 프로젝트를 통해 검증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다른 엔지니어들은 계속 딴지를 걸었다. 참 능력도 없고, 회사도 1주일에 한두 번은 안 나오고, 일도 느리게 하는 사람들이 괜히 말만 많다고 생각하며 Aaron은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엔지니어인지 얼마나 아는 것이 많은지 새삼 깨달았다.
Aaron은 이 회사가 이렇게 느리게 모든 것을 토의로 결정하면서 하면 미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세월에 모든 기술을 하나하나 비교해가면서 모든 프로젝트마다 의사결정을 민주적으로 하겠다는 것인지… 그리고 엔지니어들은 맨날 2시간씩 점심 먹고, 집에서 일한다고 회사에도 안 나오고, 그런데도 그들은 승진도 잘 되었다. 그렇게 노는 사람이 많은데도 잘 나가는 이 회사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 이 회사에서 잘 나간다는 Bryan을 만났다. Bryan 또한 Aaron에게 반갑게 인사하면서 왜 텐서 플로우와 딥러닝을 썼느냐고 물어봤다. Aaron은 텐서 플로우가 제일 잘 나가고 딥러닝이 대세인 것은 웬만한 엔지니어들은 다 안다고, 또 이전 회사에서 기획자들이 다양한 기술을 검증했는데 텐서 플로우가 가장 좋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답했다. Bryan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그것이 이 프로젝트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당연하지, 똑같은 프로젝트인걸! 참 별 걸 다 가지고 딴지를 건다.
#실리콘밸리에서 대기업으로 온 Bryan
Bryan은 에어비엔비에서 4년을 보냈다. 주식을 다 받은 그는 굳이 그 회사에 계속 있을 필요를 못 느끼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하였다. 마침 Aaron의 대기업에서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세계적 인재 Bryan에게 연봉 6억 원을 제시하였다. 정말 Why Not?이었다. Bryan은 Aaron의 전 회사였던 대기업에서 새로운 커리어 도전을 하기로 했다.
Bryan은 대기업에 들어가서 개발팀 팀장을 만났다. 팀장님은 워낙 유명한 Bryan이라 기대가 크다고 하면서 기획자와의 만나서 프로젝트를 논의해 보라고 하였다. AI를 이용한 수익 예측 프로젝트에 대해서 기획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Bryan은 다양한 머신러닝 기술들을 이야기하면서 최신 기술들도 여럿 소개하였다. 기획자는 회사 표준화 프로세스에서 검증되지 않은 툴은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본사 표준화 프로세스에 따라 자바와 텐서 플로우를 이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몇 주 후 200장짜리 기획서가 나왔다. Bryan은 기획서를 보면서 혼란스러웠다. 이미 지나간 기술을 쓰고 있고 디자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Bryan은 팀장님에게 기획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팀장님은 불편한 표정으로 기획자와 얘기해 보라고 하였다. 기획자는 지난 주말 밤새서 완성한 기획서를 비판하는 그가 매우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세계적인 전문가라고 하니 그의 말이 맞긴 할 터였다.
Bryan은 기획서의 문제점을 기획자에게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기획자는 자리로 돌아와서 한숨을 쉬면서 잘못 걸렸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Bryan이 똑똑한 건 알지만 그렇게 내 기획서를 비판하면 어쩌라는 것인가. Bryan처럼 자기만 잘난 것들은 사회생활에 문제만 일으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한 것 같았다.
다음날 Bryan은 지난 회사에서 했던 대로 기획자가 쓴 기획서를 기반으로 보완해야 할 점들과 다른 기술들에 대한 비교 등을 쓴 Design Doc을 써서 공유하였다. 회사 보안상 구글 독스를 차단시켜 놓아서 워드 파일로 만들어서 이메일로 보냈다. 아침에 보낸 이메일에 대해 퇴근시간까지 아무도 코멘트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Bryan은 자신을 무시하나, 텃새 부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새로 온 개발자가 기획자를 무시하고 기획서를 다시 써서 돌린 것에 대해서 이야기가 돌았다.
팀장님은 Bryan을 불러 어제 보낸 이메일이 무슨 의도였냐고 물었다. Bryan은 Design Doc이라고 대답하였다. 팀장님은 이미 유관 부서 보고와 사장님 보고가 끝나서 결재가 난 기획서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Bryan은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 혼란에 빠졌다. 그렇지만 자신이 할 일이 회사의 정해진 프로세스에 따라 위에서 내려온 일을 해 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Role-driven과 Rank-driven 조직의 인재상
Rank-driven 조직에서 시키는 일을 성실하고 빠르게 수행해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던 Aaron은 Role-driven 조직에서는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고 소통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 그리고 창의적으로 최선의 방법을 찾기보다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영역에 안주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Role-driven 조직에서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다양한 소통과 토론을 통해 많은 피드백을 받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Bryan은 Rank-driven 조직에서 잘난척하고 독선적이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조직문화를 해치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양쪽 다 한 조직 문화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사람이 다른 조직 문화에서는 최악의 인재가 되어버린다. 주어진 일을 빠르게 수행하는 데에 최적화된 Rank-driven 조직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미션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Role-driven 조직의 차이는 이렇게 인재상의 차이에서도 극명히 나타난다.
앞으로 혁신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를 맞이하여, 제조업에 최적화되어있던 Rank-driven 조직이 Role-driven 조직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창의적인 인재를 무조건 고용하는 것으로는 Bryan의 실패 사례를 반복하게 될 뿐이다. 맨 위에 집중되어 있는 결정권을 아래로 분배하는 위로부터의 변화가 일어나서 조직 자체의 성격이 변화하면 조직이 원하는 인재상도 자연스럽게 변화하게 될 것이다.
* Aaron과 Bryan은 가상의 인물들입니다.
글: Will.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기업 문화와 조직에 관심이 많음.
그림: Chili. 디자이너. 생각을 그림으로 요약하는데 관심이 많음.
[실리콘밸리를 그리다] 시리즈
– (9) 내가 맞추는 회사 vs. 나와 맞는 회사
– (8) 티도 안 나게 자연스러운 육아휴직
– (7) 망치로는 와인병을 열 수 없다
– (6) ‘갑’이 없는 조직
– (5) 회사 짤리기와 회사 떠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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