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를 그리다 팀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번 더 소개합니다.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은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정말 중요한 일이다. 특히 세계에서 몰려드는 인재들과 경쟁하느라 늘 바쁜 생활 때문에 아이를 갖고 키우는 일이 쉽지 않은 실리콘밸리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실리콘밸리 기업들, 미국 연방 정부,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어떻게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지원하고 있을까? 복직을 앞두고 육아휴직 기간을 돌아보며, 이 곳에서 육아를 하는 사람들과 나눴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미국의 출산/육아 휴직
법적으로 보장되는 유급 육아 휴직 일 수: 0일
아이를 갖기 전까지는 몰랐지만 알고 나서 가장 놀랐던 사실은, 선진국이라고 알려진 미국의 유급 육아 휴직이 0일이라는 점이었다. 허핑턴포스트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유급 육아 휴직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나라는 미국, 파푸아 뉴기니, 남아프리카의 레소토 왕국과 스와질란드뿐이라고 한다. 대신 미국 50개 주 가운데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3개의 주는 주 정부 차원에서 일부 정규직 노동자에게 유급 육아 휴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고, 나머지 주에서도 12주의 무급 육아 휴직을 제공하기는 한다. 그러나 결국 법적인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각 사업체의 재량으로 육아 휴직 제도가 운영되기 때문에, 같은 미국에 살고 있더라도 어느 지역에 살고 어떤 회사에서 일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육아 휴직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짧게는 약 2달, 길게는 280일까지도 법적으로 유급 육아 휴직을 제공하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미국의 연방법에서 보장되는 유급 육아 휴직 일수는 ‘0일’이다.
실리콘밸리의 출산/육아 휴직
연방 정부 차원에서 의무 육아 휴직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캘리포니아 주정부에서는 유급 육아 휴직을 쓸 수 있는 자격 조건을 갖춘 노동자들에게 (자세한 자격 요건은 캘리포니아 주 정부 홈페이지 참조) 출산 전 4주간과 출산 후 6주간 기존 월급의 55퍼센트를 지급한다. 여기에 더해,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복지에 신경을 많이 쓰는 테크 회사들이 유급과 무급을 합친 육아 휴직을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12개월까지도 제공하는 경우가 많이 있고, 얼마 전 아이를 출산한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같은 리더들도 육아휴직을 사용함으로써 아빠들의 육아 휴직도 적극 독려하고 있다. 엄마와 아빠가 함께 육아하는 집이 많아지면서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커리어를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여건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퇴근 후 교대로 아이를 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여기에 더해 많은 부모들이 자유로운 출퇴근 시간을 갖고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집에서 일하기도 하며, 아이가 아프거나 비상 상황이 생길 경우 갑자기 퇴근하게 되더라도 서로 이해하는 분위기에서 일하고 있다.
정부가 보장해 주지 않다 보니 각 회사마다 유급 육아 휴직 기간이 다르고 그것으로 직원 유치 경쟁을 하기도 한다. 넷플릭스는 엄마와 아빠 모두에게 무려 1년간 유급으로 육아휴직을 제공한다. 트위터는 20주, 페이스북과, 구글, 우버는 최대 17주의 유급 휴가를 제공하며, 에어비앤비는 12주를 제공한다. 모두 엄마, 아빠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회사
듣기에 따라서는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실리콘밸리 회사들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 그건 CEO를 포함해 직급을 막론하고 누구나 그렇다. 크게 보면, 각자의 역할이 잘 정의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으로 일시적으로 대체하기 쉽고, 결정권이 배분되어 있어 내 대신 누구나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매니저는 팀원 하나 없어도 업무가 탈 없이 잘 돌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자 역량이고, 위에서 임의대로 만든 데드라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보면 회사일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은 많이 없었고, 오히려 경제적인 측면, 이사, 아기를 봐주는 옵션 등 실제적인 육아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회사 일을 수월하게 마무리하고 육아휴직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같이 얘기해보다가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1. 육아 휴직은 여러 휴가 중 하나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다 보면 육아 휴직 외에 다른 이유로도 한 번에 1주에서 1달까지 긴 휴가를 쓰는 경우가 많이 있다. 직원들 중 이민자의 비율이 상당히 많아서 가족을 방문하거나 여행하느라 미국 밖으로 휴가를 가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의 경우에도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보통 2-3주 정도 휴가를 낸다. 1년에 한 번, 멀리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팀 내에서도 서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무제한 휴가가 있는 회사에 근무하는 친구들은 1년 중 이런 긴 휴가를 3-4번씩 쓰기도 하고, 휴가가 무제한이 아니더라도 재택근무나 Work from Korea (혹은 다른 나라/ 다른 도시) 등 다양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직원과 회사 모두 이런 잦은 긴 휴가에 대처하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고, 몇 개월간의 육아 휴직도 길이만 조금 더 긴 휴가의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2. 목표와 범위가 분명한 업무
실리콘밸리의 회사들은 회사 전체 컨퍼런스나 워크샵 등의 연중행사와 더불어 수시로 잡히는 미팅들을 통해서도 회사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나아갈지 직원들과 공유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 같은 비전, 미션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회사들의 미션 참조] 이렇게 늘 회사의 방향과 목표가 직원들에게 잘 공유되어 있기 때문에 팀의 세부 일정도 그에 맞춰 계획할 수 있고, 비상사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어떤 업무가 진행될지 예상이 가능하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일을 얼마나 오래 하는가 보다는 업무의 결과가 중요시된다. 할 일이 정확히 파악되어 있으니 어디서 근무를 해도 상관이 없고, 주어진 시간보다 빨리 일을 끝냈을 때 나머지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도 있다.
여기서 팀의 매니저는, 회사가 가고 있는 방향 안에서 팀이 하고 있는 일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파악하고 직원 개개인이 어떤 부분에서 기여할 수 있는지 조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팀원의 휴가로 공백이 생겼을 경우 팀의 역량을 파악해서 업무의 재분배, 새로운 인력 충원, 목표와 프로젝트 기간의 재조정 등을 담당한다. 이 모든 것은 위에서 일방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팀원들과 매니저 간 충분한 의사소통과 협의 하에 정해진다. 덕분에 개발팀에서 일하고 있던 한 친구는 동료가 육아 휴직을 하고 돌아왔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복직 과정이 매끄럽게 이뤄졌다는 얘기를 전하기도 했다.
3. 인생의 큰 변화를 함께 축하하고 응원하는 회사
출산이 가까워지면 미국에서는 태어날 아기를 축복하는 베이비샤워를 하는데, 회사에서도 베이비샤워를 열어주고 팀에서 선물을 해 주는 경우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규모와 화려함에 상관없이 같이 일했던 동료들에게 축하받고 휴직을 한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육아 휴직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질까 봐 눈치를 보는 일도 없고, 오히려 출산과 육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팀원들과 여러 부서에서 적극 돕는다. 특히 HR 부서 (인사팀)에서는 휴직과 관련된 많은 일들을 처리해주는데, 월급과 각종 혜택 관련해서 문제가 없도록 방법도 알려주고, 궁금한 것은 언제든 질문하고 필요한 것을 요청할 수 있으니 큰 도움이 된다. 지인 중 하나는 회사에서 근무한 지 1년이 안되어 주 정부의 혜택을 못 받는 상황이었는데 HR에서 다른 방법을 찾아주어 유급 휴직 혜택을 받기도 했다.
또한 복직 후에도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일들에 대해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분위기가 육아에 많은 도움이 된다. 아기가 아파서 데이케어를 못 가거나 응급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데 이 때 자유로운 출퇴근 시간을 갖고,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집에서 일하는 옵션을 가질 수 있어서 응급 상황이 와도 스트레스가 훨씬 덜하다. 어떤 회사들은 복직 후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몇 주간 주 3일만 출근하는 적응 기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아이의 교육에 부모가 참여하는 것도 미국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지므로 학부모 상담만 하더라도 엄마만 가는 경우는 많이 없고 아빠와 엄마 모두 같이 가는 경우가 많다. 그 외 학교 행사, 야구 게임이나 수영 수업 등의 특별 활동이 있을 때도 ‘아이가 오늘 야구 시합이 있어.’라고 간단히 리마인드를 주고 팀 일정에 PTO (유급 휴가)나 time block표시를 해 놓으면 다들 그 시간을 피해 미팅을 잡는다. 아이 때문에 죄책감을 갖거나 눈치를 보며 가족을 희생시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되고, 너무 야근을 많이 하고 있으면 업무량이 과도하게 많은 것은 아닌지 혹은 일과 생활의 균형을 잘 맞추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준다.
4. 성과로 이뤄지는 승진
임신과 육아에 따라 일을 덜 하게 될 경우 일시적으로 회사에서의 기여도가 떨어지고 승진이 조금 미뤄질 수는 있으나, 일한 기간이 길다고 해서 승진하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몇 개월의 휴직 기간이 미치는 영향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미미하다. 육아 휴직을 하고 왔다고 해서 갑자기 일 잘하던 사람들이 못 하게 되거나 못하던 사람이 갑자기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성과에도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육아 휴직을 썼다 하더라도 회사에 대한 기여가 많은 경우 오히려 고속 승진을 하는 경우도 있고, 매 해 아이를 가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몇 개월의 육아 휴직이 승진이나 성과에 대한 보상에 영향을 주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다.
직급이나 취직에 나이 제한이 없기 때문에 능력만 있다면 몇 년간 휴직을 했다가 다시 취업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나이와 경력이 승진과 비례하지 않는 실리콘밸리에서, 승진을 늦게 한다는 것은 연봉을 5-10% 정도 덜 받는다는 것 외에 큰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같은 경력을 가진 다른 사람들보다 뒤처졌다고 조바심 낼 필요도 없고, 오히려 육아 휴직을 통해 커리어의 방향을 점검해 보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5. 육아 휴직은 가족과 상의하세요.
육아 휴직은 회사와 상의하는 것이 아니다. 육아 휴직은 가족의 일이므로 가족을 최우선으로 놓고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회사는 최소로 관여하고 최대한 맞춰주었다. 그래서 휴직 계획에 대해 상의할 때, 휴가와 출퇴근 시간, 재택근무 날짜 등을 가족과 상의하고 나서 그것을 팀에게 공유했고, 정말 급한일이 아닌 이상 변경 없이 다 승인되었다. “나 육아 휴직 써도 될까?”라고 매니저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의 실리콘밸리의 매니저들은 아마 매우 당황할 것이다. 가족계획은 회사의 재량권 밖이고, 아기가 나온다는데 엄마든 아빠든 장기간의 육아 휴직을 안 쓴다는 것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일 것이다.
법적 보장도, 눈에 띄는 제도적 혜택도 많지 않지만 눈치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육아 휴직을 쓸 수 있다는 점 덕분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 육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육아 휴직은 가족을 위해 사회가 지원하고 배려하는 시간이고, 개인은 가족을 위해 커리어를 잠시 멈추는 시간이다. 새 생명을 맞이하고 기르는 것을 가치 있고 존중받을 만한 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에 힘 입어 오늘도 실리콘밸리에는 많은 생명들이 태어난다.
2017년 8월, 드디어 임신/육아 휴직을 끝내고 복직했다. 4개월만 유급이었고 나머지는 무급이었지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남편도 육아휴직을 사용해 아이를 기르는 것을 같이 경험하고 저녁마다 일찍 와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부부에게 정말 큰 의미였다.
– 글: CHRISTINE. 디지털 헬스케어 파트너십 담당. 모바일, 클라우드 서비스에 많은 경험. 조직의 다양성, 성장형 마인드셋, 여성 CEO 스타트업에 관심이 많음.
– 그림: CHILI. 디자이너. 생각을 그림으로 요약하는데 관심이 많음.
[실리콘밸리를 그리다] 시리즈
(1) 실리콘밸리를 그리다
(2) 생존하는 회사 vs. 미션을 이루어 가는 회사
(3) 스타트업 CEO의 가치
(4) 실리콘밸리의 직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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