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8일, 미국 제 45대 대통령으로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습니다. ‘설마’가 현실이 된 순간, 기쁨을 표한 지지자들도 있었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 미국의 현실을 개탄하며 전세계적으로 슬픔과 우려, 심지어 분노를 표현한 이들도 있었죠.
미국 스타트업계 역시 대선 기간 동안 힐러리 지지파와 트럼프 지지파로 나뉘어 있었는데요, 페이팔(PayPal) 공동 창업자 피터 틸(Peter Thiel) 등 소수를 제외하면 정치적 견해를 대외적으로 표명한 스타트업계의 대부분은 힐러리를 지지했습니다. 지난 6월에는 실리콘 밸리의 창업가 약 140여명이 트럼프의 정책에 반대하는 공개 서한을 내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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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결과가 발표된 후 SNS를 통해 당혹감을 표출한 업계 인사들도 많습니다. 와이 컴비네이터(Y Combinator)의 수장 샘 알트만(Sam Altman)과 창업자 폴 그레이엄(Paul Graham), 500스타트업(500 Startups)의 창업자 데이브 맥클루어(Dave McClure) 등은 트럼프의 당선 소식을 ‘악몽’이나 나치당 집권에 비유하는 등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몇몇 스타트업의 CEO는 트럼프에 대한 분노를 너무 과격하게 표출했다가 역풍을 맞자 대표직에서 사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감정적인 반응도 잠시, 사람들은 이내 트럼프의 당선 이후 행보가 스타트업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발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대선 결과 발표 한 달이 지난 현 시점에서, 새로 출범할 미국 정부가 스타트업계와 관련해 어떤 정책을 펼칠지, 지금까지 나온 공약과 발언을 토대로 정리해보려 합니다.
#H-1B 비자 발급 축소… 실리콘 밸리에 불어 닥칠 인력난?
유권자들이 경제 상황을 체감하는 지표인 고용 문제는 대선 기간 내내 트럼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동시에 아킬레스 건이었습니다. 외국인 강제 추방 및 고용 제한에 대해 수위 높은 발언이 쏟아지자, 트럼프의 선거 구호인 ‘Make America Great Again’을 패러디한 ‘Make America White Again’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는데요. 이 때문에 테크 산업에 종사하는 외국인들에게도 각종 불이익이 가해질 거라는 예측이 우세합니다. 구체적으로는 트럼프 행정부가 H-1B 비자 발급을 제한할 거라고 점치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H-1B 비자는 전문기술을 보유한 외국인이 미국에서 단기간 체류하며 일을 할 수 있게 허가하는 취업 비자의 일종으로, 미국 기업(고용주)이 고용을 보장하고 비자 수속 비용을 지불해야 발급이 가능합니다. 현재 해당 비자를 발급받은 외국인 대부분은 테크 관련 직종에 종사하고 있으며, 2014년 기준 이들의 평균 연봉은 7만 5천 달러였습니다.
외국인 고용 문제에 대해 트럼프는 인터뷰 때마다 상충되는 발언을 하며 유권자와 언론을 혼란에 빠뜨린 전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외국 출신 이민자보다는 자국민에게 고용의 기회를 우선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논조임은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H-1B 비자 발급을 감소하거나 제한할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으며, 이는 실리콘 밸리에 일시적인 인력난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난 8월, 오바마 행정부는 외국 출신의 스타트업 창업자에게 최대 5년까지 거주권을 제공하는 법안을 제안했었는데요. 트럼프가 대선 기간의 공약을 이행한다면 이 법안을 수정하거나 폐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해외 인력에 대한 비자 발급 축소가 현실화되면 이민자 출신이 많은 실리콘밸리 창업 환경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입니다. H-1B 비자는 영주권이 아니라 단기 고용을 위한 비자이므로 온도차가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스타트업 창업자 중에서는 외국에 뿌리를 둔 이민자 출신이 많습니다. 엘론 머스크(Elon Musk), 제네핏(Zenefits) 창업자 락스 스리니(Laks Srini), 우버(Uber)를 세운 개럿 캠프(Garrett Camp) 등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올해 초 미국 정책 재단(National Foundation for American Policy)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닌 유니콘 스타트업 중 51%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이민자 출신 창업자가 속해있습니다. 이들 44개 스타트업의 자산 가치를 합치면 무려 1천 6백 80억 달러에 달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익히 알고 있는 미국의 사업가들은 (대표적으로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H-1B 비자의 확대를 주장해왔습니다. 따라서 외국인 비자 발급과 관련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은 스타트업계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판가름하는 첫번째 기준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법인세 인하로 가속화할 투자 및 M&A
지난 10월 AT&T의 Time Warner 인수에 트럼프가 반대의사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실리콘 밸리의 창업가들은 그가 기업 인수 합병에 관련한 규제를 축소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본인이 사업가 출신이기도 한데다 전통적으로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이 규제에 관대한 성향을 보여왔기 때문입니다. 기업 인수 합병의 걸림돌이 사라진다면 스타트업과 관련한 벤처 캐피탈리스트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질 수 있습니다.
특히 법인세 인하에 대한 트럼프의 주장이 현실화 되면 기업들의 현금 보유액이 늘어나면서 실질적으로 인수합병 사례가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벤처 캐피털 기업 제너럴 캐털리스트(General Catalyst)의 매니징 디렉터 헤먼트 타네자(Hemant Taneja)는 법인세 인하로 미국 기업들의 자본이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경우 M&A 열풍 역시 가속화 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실제로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한 언행과 향후 미국 정세에 대한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벤처 캐피탈리스트들은 실리콘 밸리에 계속 현금이 유입될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이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투자이기보다는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수익을 노리려는 심산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지 시각 11월 30일 트럼프는 골드만삭스 출신의 스티브 므누신(Steven Mnuchin)을 차기 행정부의 재무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므누신의 발언에 따르면 연방 법인세 인하는 거의 확정된 사실로 보이는데요, 이를 바탕으로 미국 스타트업계에 M&A와 투자 확대의 바람이 불어올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오바마 케어 폐지 혹은 개정…고용주의 부담 경감
스타트업은 미국에서도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미국노동부(Bureau of Labor Statistics)의 발표에 따르면 50인 미만을 고용한 소규모 사업장의 경우 지난 4분기 동안 37%의 일자리 증대에 기여했고, 49명에서 250명 사이의 고용자를 고용한 중간 규모 사업장은 같은 기간동안 46%의 일자리 증대에 일조했습니다.
대선 유세 기간 동안 트럼프는 오바마 케어 (정식 명칭은 <환자보호 및 부담적정보험법안, PPACA: Patient Protection and Affordable Care Act>)를 ‘재앙’이라고 묘사하며 이를 폐지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는데요. 오바마 케어의 조항 중 정규직 근로자(주당 30시간 이상 근로)를 50명 이상 고용하고 있는 고용주는 의무적으로 직원들에게 건강보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트럼프의 주장대로 오바마 케어가 폐지되거나 개정될 경우 고용인에게 건강 보험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사라지므로 경영자 측면에서는 부담을 덜게 됩니다.
현지 시각 11월 28일 트럼프는 오바마 케어 반대론자로 유명한 톰 프라이스(Tom Price) 하원의원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지명했습니다. 그러나 민주당의 저항이 불 보듯 뻔한데다 트럼프가 일부 조항의 필요성을 인정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오바마 케어는 전면 폐지보다는 개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경우 여유 자금이 연구 및 개발 분야에 대한 투자로 이어질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 스타트업계에 미칠 영향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초점을 둔 트럼프의 정책이 스타트업계에도 적용된다면, 미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에 대한 불이익이나 차별이 가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만약 위에 서술한 시나리오대로 법인세 인하를 발판삼아 미국 내 스타트업들에 M&A 및 투자 열풍이 분다면 상대적으로 미국 VC의 한국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수나 규모 면에서 줄어들게 되겠죠. 한편, 한국에 제품을 서비스하거나 법인을 세우려는 미국 기업들에 대한 각종 규제 및 무역 장벽을 철폐해달라는 요구가 거세지는 상황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국내 정부기관이나 대기업부터 해외의 VC, 엑셀러레이터까지 다양한 조직의 도움을 받아 전세계를 무대로 삼으려는 한국 스타트업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전국에 산재한 18개 창조경제혁신센터의 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창업한 국내 스타트업은 올 6월 말을 기준으로 12곳에 달합니다. 미래창조과학부는 글로벌혁신센터(KIC) 워싱턴 및 미국의 정보보호 특화 엑셀러레이터인 ‘마하37(MACH37)’ 와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내년부터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을 후원하는 계획을 세운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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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상황에서 언어적, 문화적 장벽에 정치적 어려움까지 더해지지 않도록 트럼프 행정부가 스타트업과 관련한 정책 전반을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전개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미 미국 시장에 진출해있거나 앞으로 진출할 한국 스타트업들 역시 법제적, 행정적, 경제적 변화에 주목하고 주도면밀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사를 작성중이던 12월 6일, 트럼프는 일본 소프트뱅크(SoftBank) 손정의 회장과 만나 미국 IT분야에 대한 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약속받았습니다. 한술 더 떠 14일에는 뉴욕에서 실리콘 밸리의 주요 기업인들과 만날 예정임을 밝혔는데요, 이는 트럼프가 먼저 테크 산업계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미국 경제를 견인할 기술 기반 스타트업들에 대한 당선인의 러브콜에 일단 관련 산업계는 안도감을 표하고 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은 대선 기간의 공약이나 발언대로만 정책을 펼쳐 나가지는 않습니다. 이는 트럼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예측 없이 방관하기에는 미국 행정부의 교체가 미국 스타트업계에 미칠 영향, 어쩌면 한국 스타트업계에까지 미칠 영향이 너무나 큰 것이 사실입니다. 제대로 알고 대비할 수 있도록, 미국의 상황을 주시해야 할 필요성은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