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스타트업계에서 꽤 오랜기간 인기를 누리고 있는 키워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입니다.
파괴적 혁신: 단순하고 저렴한 제품이나 서비스로 시장의 밑바닥을 공략한 후 빠르게 시장 전체를 장악하는 방식의 혁신을 말한다. 세계적 경영학자인 미국의 크리스텐슨 교수가 창시한 용어로 그가 1997년에 쓴 저서 《혁신 기업의 딜레마》를 통해 처음 이 개념을 소개했다. – 네이버 지식백과
많은 영역이 있겠지만, 크게 부각이 되고 있는 곳을 고르라면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간편결제를 필두로 한 핀테크, O2O, 그리고 배송(물류)입니다. 이는 국내의 트렌드만은 아닙니다.
모바일만 있으면 터치 몇번으로 결제할 수 있으며, 언제 어디든 오프라인 식당의 음식을 배달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송 기사가 각종 주문한 물건을 배송해주죠. 바야흐로 모바일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시대가 임박했습니다.
세 영역들에 대해 지난 1년여간 취재해오면서 머리속을 떠나지 않던 한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겉모습만 혁신하는 척하는 건 아닐까?
최근 떠오른 한국 간편결제(핀테크), O2O, 그리고 배송(물류) 영역의 ‘혁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이들은 가장 앞단인 모바일 편의성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용자를 확보하기 위해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은 서비스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전략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머물러 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뒷단에서의 혁신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편 결제, 송금은 핀테크 영역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증권, 보안, 블록체인, 보험 등 다양한 영역이 있죠. 다만,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게 간편결제, 송금입니다. 이 영역은 은행들이 지난 20여년간 수천억원의 돈을 투자한 금융공동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금융공동망: 국내 금융기관 상호간의 업무를 위해서 만들어진 시스템. 국내 금융기관간의 거래는 모두 금융공동망을 거쳐서 처리된다. – 나무위키
금융공동망이 생기기 전에는 이 모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했습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고객이 은행에 돈을 입금하면, 이를 수기전표로 작성한 뒤 한국은행으로 보내는 체계였죠. 이를 전자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했고, 1금융권 은행들이 삼삼오오 이 배에 올라탑니다. 실시간으로 입금, 송금, 출금이 가능하게 된 지점이었죠.
그러나 해외에서는 실시간 체계가 전무한 나라가 많았습니다. 미국만 봐도 주 단위를 넘어서거나, 타 은행 간 거래를 할 때 불편했죠. 주 별로 송금, 결제 방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실시간은 언감생심. 당일 결제, 송금조차 불가능했습니다. 페이팔은 이 지점에서 혁신을 일으켰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실시간 송금과 결제를 가능케 만든 것이죠. 인프라단의 혁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변화였습니다.
관련 국내 스타트업의 양상은 이와 다릅니다. 모바일 송금, 결제의 편의를 강조하긴 했으나, 기존 공동망 체제에 숟가락을 얹은 모습이죠. 1년 전 마소에서 핀테크 관련 기자간담회를 했을 때 박성혁 PAG&파트너스 대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지적했습니다.
결국 문제가 뭐냐면, 혁신도 좋지만 인프라 비용을 누군가 내야 한다는 거다. 스타트업을 만나보면 ‘인프라가 깔리면 그 위에서 무언가 하겠다’고 말하고는 하는데, 그 인프라 구축 비용은 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근거리무선통신(NFC)만 해도 전국에 깔린 몇백만 대 결제 단말기를 모두 교체해야 이걸 쓸 수 있다. 아무도 그 비용을 안내면 혁신이 없다. 지금 논의가 그렇게 가고 있다. – 2015녀 마소 핀테크 좌담회 中 박성혁 PAG&파트너스 대표
배달앱으로 대표되는 O2O(Online to Offline) 서비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O2O라는 개념은 중국에서 처음 나온 개념입니다. ‘어러머’ 같은 배달 서비스가 1조 5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받는 등, 중국 내에서 화두인 키워드죠.
이것도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배달 문화가 없다시피 했던 나라입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은 1도시에서도 한인 밀집 지역을 제외하고는 배달이 없었죠. 중국인들은 음식을 포장하는 것에 익숙했습니다. 이를 혁파한 것이 젊은 2030 세대였죠.
교통 문제와 어마어마한 식당 대기 시간을 상징하는 ‘파이창롱(排长龙) 문화’가 가장 큰 이유입니다. 베이징, 상하이와 같은 중국 제1 도시들은 출퇴근, 식사 시간에 사람들로 붐빕니다. 중국 직장인들의 급여 상승 역시 주요 요인 중 하나입니다. 중국 제1,2 도시의 2030 세대의 급여는 앞선 세대와 비교해 크게 상승했는데요. 대신 칼퇴근 문화가 없어지고 야근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는 숫자가 증가했습니다. – ‘변화무쌍’ 중국 O2O 시장…장벽 넘은 ‘배달 문화’(모비인사이드)
물류(배송) 혁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주자로 꼽히는 기업은 쿠팡입니다. 이들은 데이터 분석에 기반한 물류 센터의 공급 체인 효율화, 쿠팡맨을 통한 배송 기사 직접 고용 등을 통해 시장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마케팅 슬로건’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죠. 100만 품목을 직접 매입해 당일 배송하는 게 가능하냐는 점이 관련 업계의 지적입니다.
친절한 쿠팡맨을 앞세워 고객 만족도를 높인 뒤, 더 많은 고객에게 입소문으로 퍼져나가는 전략을 펼친 것으로 볼 수 있는데요. 높은 장벽이 하나 있습니다. 택배사업자들과의 법적인 이슈인데요. 재판부가 일단 쿠팡의 손을 들어준 상태이긴 하지만, 완전히 합법화됐다고는 보기 어려운, 애매한 상황입니다.
- 관련 기사: 쿠팡맨들 ‘로켓배송’ 계속 할 수 있다.(중앙일보)
국내에서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IT 사대주의
- 기술보다는 마케팅
- 애매한 규제
일단,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나오는 서비스들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인기 서비스를 본떠 만든 것들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우버’입니다. 국내에서 이를 베낀 수많은 택시앱이 등장했는데요. 다만, 면면을 보면 모바일로 택시를 부를 수 있다는 점 말고는 특이 점이 없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서비스의 철학이나 본질에 대한 것은 감안하지 않는 건 문제입니다. ‘실리콘밸리에서 뜨는 서비스는 우리나라에서도 잘될 거야’ 식의 태도로는 혁신적인 서비스가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죠.
이러한 형태의 서비스들은 본질적인 불평등, 불합리를 바꾸지 않더라도 소비자의 이목을 끌기 쉽습니다. 즉, 마케팅하기 좋다는 의미입니다. 빠르게 돈을 보내고,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 소비자들은 움직입니다. 편리하니까요. 하지만 금융공동망에 수천억원을 투자한 1금융권 은행, 결제 대행업체들, 카드사, 매장 주인 등 서비스를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에게 줄 수 있는 비즈니스적 가치를 감안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의문이 듭니다. 즉, 이들의 이해당사자들의 플랫폼을 이용하되, 리워드를 주지 못하는 셈인데요. 얼마나 지속성을 가질 수 있을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애매한 규제는 서비스의 혁신을 방해합니다. 쿠팡의 예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쿠팡맨이 타고다니는 자가용 화물자동차는 합법과 불법의 상황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간 업체들은 법의 규제로 인해 노란색 번호판을 단 영업용 차량만 이용해왔기 때문입니다. 일제 침략기 때 도입된 법 규제 때문인데요. 오래된 규제가 해소돼야만 관련 업계의 비효율이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업체들도 TPL(Third Party Logistics)과 같은 물류 혁신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쿠팡뿐만 아니라 기타 이커머스 업체들도 직접 배송 기사를 고용하고, 자가용 차량으로 배송할 수 있는 혁신이 이뤄지는 셈이죠.
‘파괴적 혁신’은 겉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겉모습을 따라하면 홍보나 마케팅하기에는 편하겠죠. 하지만 스타트업의 존재 이유는 홍보나 마케팅이 잘 되는 서비스를 만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들이 주목을 받고, 투자를 받는 이유는 기존의 비효율, 불합리한 생태계를 바꿀 기대감 때문일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시장에 존재할 이유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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