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 때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봤다. 외국어를 그다지 잘하는 것도 아니다. 이 남자에게 글로벌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키워드였다.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여서일까. 계속해서 해외 파견에 손을 든 결과 중국 주재원으로 나갈 기회가 생겼다. 그러고선 삶이 바뀌었다.
약 19년의 한국 기업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음주 말레이시아로 터전을 옮기는 조철현 전 11번가 글로벌PMO팀장(사진)의 이야기다. 그는 왜 한국 밖의 삶을 꿈꿨을까.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요청에 출국 전 바쁜 시간을 쪼개어줬다. 지난 1월 13일 조 팀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1막 – SI로 시작한 프로그래밍
조철현 팀장의 전공은 수학이었다. 그에게 프로그래밍은 취미 생활에 불과했다. 하지만 막상 취업 시즌이 다가오자 강력한 무기가 돼줬다. 첫 회사는 30~40명 규모의 금융 SI 업체였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던 1995년은 보험사 영업사원 말고는 취업할 수 있는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학을 전공한 것을 잠시 후회했던 때이기도 하지요. 프로그래밍은 초중고 학생일 때 취미생활로 했으나 직업으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는데 취업을 준비하다 보니 뭔가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에서 소프트웨어 공학을 전공했고, 2년 후 1997년 IMF를 앞둔 상황에서 금융권 SI 컨설팅 회사에 입사하게 됩니다.”
회사 분위기는 일반 SI 업체들과는 다르게 자유로웠다. 거의 모든 직원이 사내 동호회에 가입돼 있었으며, 한 데 어울려 국내 여행도 자주 다니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작은 규모에서 신입 사원들에게 3개월 간 교육을 하는 문화도 있었다. 당시 조철현 전 팀장이 담당한 업무는 경영정보시스템(MIS) 개발이었다.
“당시 고객사가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이었는데요. 차세대 프로젝트에 투입됐습니다. ‘웹’이란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죠. 시스템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그간 문서로 수작업으로 해오던 것을 시스템화하는 개발이었습니다. 회사 규모가 작다보니, 서버, DB, 미들웨어 부분까지 배우면서 개발할 수 있었죠.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자연스럽게 회사를 나가게 됐고, 대학원 선배가 창업한 벤처로 이직을 하게 됐습니다.”
벤처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조 팀장이 담당했던 업무는 그 회사의 ‘캐시카우(cash-cow)’ 역할을 했으나, 내부에서는 연구소를 세워 새로운 제품 개발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의 역할이 다 끝나자, 미련없이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그 다음 직장은 CJ였다.
2막 – 터닝 포인트…ERP를 만나다
“때마침 친구의 소개로 CJ그룹의 계열사인 아이삼구란 쇼핑몰로 이직하게 됩니다. 그때가 2000년 10월이었죠. 그리고 14년 간 저는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제가 담당한 주력 업무는 더 이상 개발이 아니었고, 쇼핑몰 운영이었습니다. 당시 CJ오쇼핑이 쇼핑몰 사업을 확대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요. 저는 여기에서 프로젝트 관리자(PM) 겸 개발자로 일하게 됩니다. 매일 새벽 2~3시에 퇴근해서 오전 8시까지 출근했는데요. 결혼 날짜를 잡은 와이프에게 파혼당할 뻔했을 정도로 바빴습니다(웃음).”
PM 업무는 개발과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직접 모든 것을 개발할 수 없기에 이 일을 맡길 파트너가 필요했다. 하지만 신입 PM과 다름 없었던 조 팀장에게는 쉽지 않은 업무였다. 가령 2001년 6월 23일에 CJ몰을 구축하라는 프로젝트 명을 받았는데, 오픈 일자는 8월 1일이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을 실전에서 해결해나갔다.
이후에는 CJ몰의 회사 내 지식관리 시스템과 전사지원관리(ERP) 구축 프로젝트를 순차적으로 수 년 간 담당했다. 그는 “당시 ERP를 담당한 것은 행운이었다”고 강조했다.
“ERP 프로젝트를 하면서 커머스 플랫폼이 운영되는 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업무를 표준화하는 역할을 하는데요. 국내외 유통업에 속한 직원들, 이들의 업무를 한 눈에 보기에 가장 좋은 시스템이기도 했죠.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하나 해외에서는 당연한 개념인 물품 대량 구매시 리베이트 측정 기술부터, 온라인과 오프라인 통합 재고관리 시스템 등의 기능들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허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조 팀장과 글로벌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보였다. 신혼여행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해외에 나간 적 없는, 그리고 외국어 실력이 유창하지도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글로벌로 이끌었던 것은 끊임없는 도전이었다.
“신혼여행 때 처음으로 해외를 다녀온 뒤에 ‘해외에서 일하고 싶다’는 상상을 늘 해왔습니다. ERP 프로젝트를 하면서 한국으로 들어온 외국인 컨설턴트와 2년여 같이 일할 기회를 얻으면서 꿈을 구체화할 수 있었죠. 막연한 해외 진출에 대한 생각을 좀 더 구체화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만약 곧바로 해외로 나갔더라면 부담스러웠겠지만, 홈그라운드에 그들이 온 것이기에 적응도 쉬웠죠.”
3막 – 한순간에 찾아온 글로벌 진출 기회
기회는 한 순간에 왔다. ERP 프로젝트가 완료되고 운영 업무를 1년여간 하던 중이었다. 조 팀장 개인적으로는 가장 지루하고 힘들었던 시기였다. 2008년 중국 상하이의 동방CJ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아주 우연히 말이다.
“4년여간 구축한 ERP 시스템 운영 업무를 저에게 하라고 하더군요. CJ 다니던 14년 중 가장 힘들고 지루했습니다. 적응만 3개월이 걸렸죠. 이 시기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러 다니기도 했습니다(웃음). 그런데 1년 쯤 지났을까. 동방CJ의 시스템 구축 사업을 총괄하던 글로벌 프로젝트 TF 팀장님이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면서, 공석이 생겼습니다. 2004년 동방CJ가 설립된 직후 계속해서 그곳에 가고 싶다고 소리쳐온 저에게 기회가 온 거죠.”
조 팀장은 정말로 막연하게 4년 동안 해외에 나가고 싶다고 손을 들어왔다. 그러다보니 조직원들 모두 이 사실을 알게 됐고, ‘조철현’ 하면 해외에 나가고 싶은 직원이란 인식을 갖게 됐다. 그랬기에 급작스레 공석이 생겼을 때 그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가 상하이에 갈 수 있었던 이유는 홈쇼핑 비즈니스로서의 선도국인 한국, 그리고 기술 중심의 CJ 소속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홈쇼핑 비즈니스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나라는 미국과 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시스템과 기술을 중시하던 회사는 CJ와 GS 정도였죠. CJ가 해외 사업을 할 때 핵심 역량으로 둔 것은 상품, 물류, 그리고 IT입니다. 세 가지 영역은 모두 자체 인력과 기술로 하겠다는 건데요. 제가 동방CJ에 가서 한 일 역시 CJ오쇼핑에서 구축해온 ERP 등 비즈니스관련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해 11월 상하이행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처음에만 하더라도 한 달 계획의 짧은 출장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프로젝트가 끝까지 현지에서 프로젝트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조 팀장으로서는 출장 기간 연장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귀국 일정은 이듬해 5월로 연기가 됐다.
하지만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2009년 4월 어느 날, 갑자기 5월에 인도로 이동해 프로젝트를 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하지만 회사에서 늘 해외에 가고 싶다고 목소리를 냈던 조 팀장으로선 거절하기 쉽지 않은 지침이었다.
“인도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나라였습니다. 중국에 처음 갔을 때도 기대감이 많았지만, 실제 업무에서는 어려움이 많기도 했습니다. 중국 직원들은 아주 세부적인 영역까지를 친절하게 지시를 해야 주어진 일을 합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것처럼 하면 난처한 일이 발생하기 십상입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와 가까운 곳이기도 했고, 큰 어려움까진 없었는데 인도라니요.”
인도는 중국보다 더 어렵고, 열악한 상황이었다. 일단 시차가 1시간에서 3시간 30분으로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인도인들과 같이 일하는 것은 중국인들보다도 많은 어려움을 줬다. 심한 표현으로는 글을 읽을 줄만 알면 따라할 수 있도록 업무 지시를 해야 했다. 조 팀장은 “느림의 끝을 봤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중국에서의 경험도 있는 상황이라 큰 고민을 하지 않고 프로젝트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뭔가요. 인도 사람들은 중국인들보다도 더 느리고, 일을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약속을 잡으면 한두 시간 늦는 것은 다반사였죠. 어느날은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오후 1시까지 안오더군요. 그래서 밥을 먹으려고 식당을 갔는데, 갑자기 호출이 왔습니다. 지금 도착했다고요. 그래서 수저만 올려놓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죠. 회의 중에도 나가서 한시간 이상 전화한 뒤 돌아와서 아까 논의했던 내용을 다시금 끄집어내는 경우도 잦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 외국에서 일을 할 경우 커뮤니케이션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죠.”
중국 때와 비교했을 때 그나마 나은 것은 영어를 쓴다는 점이었다. 중국에 있을 적엔 중국어를 아예 몰랐기 때문에 직원과의 소통이 불가능했다. 업무 지시를 하고, 중국 직원들은 결과를 가져오는 구조였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더듬거리며 하는 영어로도 충분히 소통을 할 수 있었다. 특히 토론 문화를 좋아하는 인도인들과 대화하며 영어 실력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조 팀장은 인도에서의 생활을 통해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울 수 있었다. 위에서 시키는대로 만들어주는 시스템적인 업무가 아니라 개인 역량에 따라 사업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주는 그런 경험을 체득한 것이다.
4막 – Born to be Global…이제는 완전히 해외로
그해 10월 완전히 귀국한 뒤 2년여 동안은 CJ오쇼핑의 해외사이트의 IT 시스템에 대한 구축 관련 기획 및 총괄 업무를 담당했다. 단발적인 해외 출장도 자주 다녀왔다. 그러던 그가 14년간 다니던 CJ를 그만두고 11번가로 이직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012년부터 조직이 개편되면서 저는 국내 개발팀장으로 보직이 바뀌게 됩니다. 개발 업무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몇년 만에 현업으로 돌아오니 적응할 시간이 많이 필요했죠. 6개월 정도의 기간을 거쳐 적응을 완료하긴 했는데, 그때부터 고민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일을 하면서 두 가지 키워드는 놓치지 말자는 결심을 했는데요. 그게 ‘기술’과 ‘글로벌’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마존웹서비스(AWS)와 스플렁크 기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기술과 글로벌 사이에서 이도저도 못잡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러다가 11번가에서 말레이시아 프로젝트 관련해서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11번가는 2013년 터키에 오픈마켓을 오픈했고, 2014년엔 말레이시아 론칭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조 팀장은 11번가에 합류한 뒤 PM으로서 다시 말레이시아 행 비행기를 탔다.
“7개월여간 진행했던 11번가의 프로젝트 때는 그간 CJ에서 겪은 중국, 인도 프로젝트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터키와 인도네시아에 서비스를 오픈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사전 어려움들을 미리 예측해놓았기 때문이죠. 뛰어난 팀원들 덕분에 숟가락만 얹은 게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웃음).”
그런데 그가 오는 1월 25일 퇴사 후 한국을 떠나 말레이시아로 간다. 11번가에서는 글로벌PMO 팀장으로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졌음에도, 그는 왜 이러한 결정을 했을까. 조 팀장은 ‘절박함’을 강조했다.
“해외에서 근무하며 주재원을 지켜보았던 2년여간 한결같이 느꼈던 점은 ‘온실 안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몸은 해외에 있으나, 초점은 한국 본사에 있었던 적이 많습니다. 그런 것이 싫어서 인도나 말레이시아에 머물 적엔 현지 식당, 시장에 자주 가거나, 현지 사람들과의 네트워킹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 역시 한계였죠. 그래서 2년간 계약으로 PMO 및 품질관리 업무로 말레이시아에 갈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약직이든 정규직이든 얻을 것이 더 많을 것이란 확신을 했습니다. 어차피 해외에서 일하는 게 목표였으니까요.”
조철현 팀장은 2년 뒤에도 해외에서 일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ERP를 통해 유통업의 비즈니스와 시스템을 공부했고, 세 차례의 해외 근무 생활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서비스가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하는지 그 모든 시행착오를 배웠다. 그러한 노력의 선물로 그에게 2년이란 시간이 주어졌다. 말레이시아에서 꽃을 피울 조 팀장의 도전,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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